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종이 Nov 15. 2016

완벽한 연인을 만나는 방법

<루비 스팍스 Ruby Sparks>(2012)

1.

 친구가 실연을 당했다. 아니 혼자 당한 게 아니라 상대방도 당했으니 실연을 겪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지긋지긋한 다툼 끝에 연애라는 과업을 내려놓게 된 친구 왈. 나 진짜 다음에는 나랑 정말 잘 맞는 사람으로 고를 거야. 웃기지마 네가 고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닐걸. 아니 그걸 떠나서 나랑 다르게 밝고 외향적인 모습에 끌려서 만났더니 이게 영 아니다 이 말씀이지. 옳은 말씀. 정말 다음번에는 나랑 비슷한 구석이 많은 사람을 만나야지 그러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사랑하겠지? 당연히 그렇고 말고 라고 말은 하고 돌아왔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이해'라는 말을 꽤나 쉽게 입에 담는데, 그 단어가 쉽게 말해지는 것에 비해 이거 정말 어려운 일 아닌가? 현재 연애 진행 중인 연인들에게 주로 하는 말. 상대방을 이해하세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받아들이세요...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등등 사랑은 '이해'하는 거라고 거품을 문다. 그게 아름다운 것이며 진정한 사랑은 그래야만 한다고. 근데 이거 어찌 들으면 꽤나 '폭력적'인 언사다(비슷한 맥락의 말로 명문대 어떻게 가요? 국영수 위주로 하세요 따위가 있겠다). 상대방의 이런저런 점이 맘에 안 드는데 어떻게 그것마저 사랑해! 내 연인의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싫어하고 저항할 '자유'가 난 있다고! '이해'가 안되는데 무작정 '이해'를 하라고 마냥 밀어붙이는 것은 갈등의 골을 좁히는 것보다 키우는 효과가 더 탁월할 수도(그리고 진짜로 '이해'라는 게 가능하다면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닮은 구석이 많든 적든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2.

 촉망받던 젊은 소설가 캘빈(폴 다노 역)은 첫 소설의 대 히트 이후, 기나긴 슬럼프에 빠져있다. 첫 소설 이후에 차기작 장편소설은 커녕 가벼운 글마저도 잘 써지지 않는다. 또 예전에 헤어진 연인의 그림자에서조차 못 헤어 나와 제대로 된 인간관계라곤 혈육인 친형뿐이다(부모님과도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잇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인간관계의 소통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정신과 주치의의 권유로 꿈에서 만난 '환상 속 여인'의 모습을 글로 쓰게 된다. 붉은 머리, 작은 체구 같은 외형적인 모습은 물론이고 출신 지역, 이전의 연애, 가족관계 따위의 시시콜콜한 요소까지도 자신이 바라는대로 종이 위에다 묘사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자신이 타자기로 묘사한 '꿈에 그리던 그녀'가 소설 속에서 현실로 튀어나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그렇게 '그'가 창조해낸 '완벽한' 연인 '루비' (조 카잔 역)와의 연애가 시작된다.

3.

 현실에 존재하는 여자들에게 염증을 느낀 한 조각가(=예술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이상형대로 여성을 조각하자, 사랑의 신도 감복하여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줘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그리스 신화. 영화 <루비 스팍스>는 대놓고 이 <피그말리온 신화>를 모티브로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창조한 예술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조각상을 비너스가 사람으로 만들어준 후 결혼에 골인해서 '당연히'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라는 동화적 해피엔딩에서 현대적 재해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요구한다. 그래서 영화는 그리스 신화가 가지 못했던 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 예술품이 생명을 얻어 사람이 돼서 사랑에 빠지고 해피엔딩인데... 그래서 그 피그말리온 씨의 결혼생활을 어땠대? 잘 맞았대?라는 삐딱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즉, 피그말리온과 그의 조각상의 그 후 연애 생활은 어땠을까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타당하다. 사랑과 다르게 연애는 시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후관리가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4.

 캘빈이 타자기를 통해 글로 써 내려간 창조물, 사랑스러운 '루비 스팍스'는 사실 캘빈 그 자신이 투영된 또 하나의 캘빈이다. 예술가와 창작물의 관계가 그러하듯, 루비라는 예술품은 작가의 내면에 있던 것들이 밖으로 현신한 것이니까. 극 중 캘빈이 쓴 글로 설명되는 루비의 설정들(고향, 성격, 과거)은 그 자세하고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딘가 캘빈의 것들과 대치를 이루며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캘빈과 루비. 이 둘은 전 연인과 부모와의 관계 등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라는 것. 또 누군가 외부에서의 변화를 기다리고만 있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점이 판박이라는 것. 좋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꼭 맞는 짝이라면 그들의 연애 생활은 행복하겠지. 하지만 자기 자신 그 자체이자 '완벽한' 이상형과의 연애 생활은 영 순탄치 않다. 자꾸만 어딘가 삐걱댄다.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회의적인 일침이다. 어이 거기 너희들은 너희가 상상하는 완벽한 이상형과도 연애하기 어려워. 언감생심 더군다나 어떻게 너희들과 달라도 한참 다른 사람들을 완벽히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5.

 뭔가 문제가 있겠지 하며 이번 한 번만 이라며 캘빈은 '이미' 완벽한 이상형 루비를 더 자신에게 맞게 '완벽'하게 바꾸기 위해 소설을 고쳐 쓰며 그녀를 요리조리 고쳐보지만 먹통인 연애전선은 나아지지 않는다. 당연한 흐름이지만 그녀와의 연애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전반적인 영화의 유쾌하고 따듯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의외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은 서슬 퍼렇게 날카롭다. 사람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폭력(권력)'이라는 것. 상대방을 내 입맛과 편의에 맞게 움직이는 '폭력(권력)'이 연애라는 우리가 아는 한 가장 달콤한 관계에서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어쩐지 달콤 씁쓸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곰곰이 뜯어보면 말도 안 되는 이 말이 가진 아이러니다. 영화의 따듯한 결말과 전반적인 유쾌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꽤나 절망에 가까운 이 영화의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니들 머릿속에서만 계속 그리고 있는 이상형이 나타나면 맘고생도 안 하고 편하게 행복한 연애 할 수 있을 거 같지? 절대 아니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현실로 눈을 돌리자고.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 완벽한 연애와 완벽한 연인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리고 달콤하기만 한 연애라는 것은 동화에만 있는 것이라고.

6.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난 뒤에 우리는 또 한 번 날카로운 농담에 직면한다. 그럼 글로 쓴 루비가 '마법'처럼 사람으로 살아나게 된 이유는 왜 끝까지 설명해주지 않는 거야? 당연하다. 사랑에 빠진다는 현상 자체가 마법과도 같다는 것이다. 왜 빠지는 건지 설명할 수도 없고 이유도 모른다. 아마 인간의 영역 밖일지도 모른다(신화에서 여'신' 비너스가 그랬듯 말이다). 언제 빠지게 될지 어디서 빠지게 될지. 인간인 우리가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마법'인 것이다. 누군가와 연애하게 된다는 것은.



매거진의 이전글 <배트맨> 팀 버튼 VS 크리스토퍼 놀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