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PD Nov 19. 2023

'비열한 거리'는 비열하지 않다.

2006-06-07

조폭영화에는 이제 질렸습니다. 그 본류인 누아르서부터 조폭코미디, 조폭 멜로에까지 조폭 캐릭터가 진출해 있지 않은 장르가 없을 정도입니다. 검은색 양복에 온몸에 떡칠한 문신, '네 형님'으로 마무리되는 대사가 들려오면 이제 구역질이 날 지경입니다. 그래도 조인성이 조폭이라는데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조직의 중간 보스인 병두(조인성)은 딸린 식구들 먹여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달입니다. 든든한 스폰서 잡아서 안정적인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꿈꾸는 병두에게 사실 조폭 간의 의리는 과거의 모토에 불과합니다.  황 회장(천호진)은 병두의 형님 상철(윤제문)이 더 이상 자신의 구린 일을 처리하지 않자 병두에게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황 회장의 아쉬운 일을 처리한 병 두는 상철을 젖히고 독립하게 됩니다. 이런 병두에게 영화감독 지망생인 초등학교 동창(민호)이 나타나자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예전부터 그리워하던 현주(이보영)를 민호를 통해 만나게 됐거니와, 자신의 범죄 행각을 소재를 구하고 있던 민호에게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비열한 거리]가 비열하지 않은 이유는 이 영화는 정통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이비 조폭 영화에 취한 많은 관객들도 [비열한 거리]를 걸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어설픈 조폭 영화가 아닙니다. 그들의 세계에 솔직한 메스를 들이대었습니다. 누아르 영화의 정석대로  반영웅적인 주인공 병두의 삶이 무겁고 어둡게 그려집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진지하고 심각합니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이 영화의 폭력 씬은 결코 폭력을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그 잔혹성에 등장인물들이 괴로워하듯 관객도 그 폭력성에 충격에 빠집니다. 이러한 선명성이 이 영화를 기존의 조폭 영화와 다른 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유하 감독의 도가 튼 듯한 연출도 놀랍습니다. 이미 수차례 메가폰을 쥔 연륜 있는 연출이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하는 영화 속에서 최대한 연출로서의 자신을 절제하며 등장인물들의 힘과 매력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연출자가 관객에게 자신을 숨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관객에게 자신의 감각과 영상미를 보이기 위해 카메라를 연신 흔들어 대는 연출 행위는 초보 감독들이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입니다. 유하 감독은 인물과 카메라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 냉정함을 잃지 않았고, 어느 순간 관객을 스크린에 몰입하게 만드는 노련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아....... 조인성.


대한민국의 TV, 영화 제작자라면 누구나 탐내는 조인성은 이번에도 멋있습니다. 배우로서의 완벽한 외부적 조건이 아직도 그를 압도합니다. 조인성이 분한 병두를 보면 아직 김병두보다는 조인성이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인성의 연기가 아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살기 위해 비열한 선택을 하는 병두의 삶을 잘 포착했지만, 아무리 검은 양복에 전라도 사투리를 내뱉어도 조인성의 매력은 양복 단추 사이로 새어 나옵니다. 조인성이 아닌 다른 배우가 했더라면 아마 병 두는 더욱 사실적인 인물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조인성이었기에 관객은 이 영화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익숙한 플롯에 결말부에 가서는 당황스럽습니다. 작가이자 감독인 유하는 관객들과의 '누가 제일 비열한 인물이야?' 하는 두뇌 싸움에서 어느 순간 손을 들고 링을 떠나버립니다. 반전을 꿈꾸는 관객들에게 유하는 '우리 인생에 반전은 없다'는 정통파적인 스토리를 선사하며 엔딩 크레디트를 올립니다. 머리 쓰던 관객들이 허무한 즈음 '모두가 비열한' 우리의 인생이 아스라이 비추어졌음을 느끼게 합니다. 스토리까지 정통파이니 저처럼 머리 쓰시지 말고 영화를 감상하시가 바랍니다.


생각보다 영화가 깁니다. 아마 6월 15일 본격적인 개봉에 들어가기 전 유하감독은 다시 한번 편집의 칼을 들이대야 할지도 모릅니다. 병두의 애정사가 재미있긴 하나 물과 기름처럼 영화의 전체적인 맥과는 유리되어 있음을 느꼈는데 감독에게 자신의 생살을 잘라 낼 비정함이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재즈의 대가인 유하 감독이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를 마지막 곡으로 선택한 것도 제게는 흥미로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영화에는 재즈가 한 곡도 소개되지 않았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