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드라마 알쓸신잡 1
1993년 어느 가을 아침, 동국대학교에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SBS 공채사원을 뽑는 필기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그 인파 속에는 대학 졸업 후 언론사 입시를 재수하던 나도 들어가 있었다. 그날부터 시작한 몇 주간의 전형을 거치면서 나는 기적과 같은 행운을 거머쥐어 SBS 드라마 PD가 되었다. 당시 800대 1이라는 경쟁을 뚫었으니 이건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이 내게 여러 번 미소를 보낸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1993년은 케이블 TV가 출범하기 전이었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곳은 지상파 방송사가 유일한 시기였다. 지금은 여러 드라마 제작사가 드라마 제작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드라마 제작은 방송사의 독점적인 산업이었다. 외주제작사가 있기는 했지만 한 손으로 그 숫자를 헤아릴 만큼 적었던 시기였다. 당연히 드라마 연출자가 되는 것은 지상파 방송사에 입사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드라마 PD가 되었고 ‘세 남자 세 여자’란 월화드라마의 조연출을 시작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케이블 TV가 보급되면서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보급되었고 디지털 혁명이 우리 삶의 곳곳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웨이브와 같이 스트리밍으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등 미디어 환경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1993년 이후에 벌어진 미디어 격량의 시기에 드라마 제작과 유통 과정의 변화를 가까이서 보았고 때로는 그 변화에 직접 참여했다. 이 또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느낀 격세지감의 변화는 다른 나라의 시청자가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높은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내게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기쁜 현상이지만 동시에 당황스러운 현상이기도 했다. 국내 시청자를 겨냥해서 만든 드라마가 외국 시청자로부터 반응을 일으킨 것은 계획된 결과라기보다는 우연한 성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의 방송인이나, 국내외의 연구진이 한국 드라마가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둔 비결을 물으면 왠지 궁색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그들이 K 드라마 제작진에게 보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질문은 2015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연구진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한국 드라마의 국제 경쟁력을 두고, 한국 정부의 어떤 정책이 TV 드라마를 발전시켰냐는 것이었다. 두 번째 질문은 2015년 5월 <냄새를 보는 소녀>(SBS, 2015)라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방송한 직후였다. 중국에서 온 드라마 프로듀서가 한국에서 <냄새를 보는 소녀>와 같은 특이한 드라마를 기획할 수 있는 역량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냐고 물었다. 세 번째 질문은 2017년 베트남 언론인과 만나서 받은 것이었다. 한국 드라마 제작진은 어떤 체계와 관행이 있어서 기획의 차별성과 경쟁력을 갖추었느냐는 질문이었다. 위 질문은 한국 드라마 제작 시스템, 특히 기획의 방식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당시에 현업 드라마 PD로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답했으나 아무래도 주먹구구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뭔가 정리되고 체계적인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려 했고 그것이 결국 박사학위 논문이 되었다. 최근 가장 자주 들었던 질문은 다음의 것이다.
"왜 당신은 오징어 게임과 같은 작품을 기획하지 못하느냐?"
이 질문은 드라마 PD에게 할 수도 있지만, 방송사와 같은 플래트폼을 향할 수도 있고, 드라마 제작사나 스튜디오를 향할 수도 있다. 만약 위의 질문에 대해 검증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 답을 찾는다면 한국 드라마의 성공은 다른 나라로도 이식할 수 있을 것이고, ‘오징어 게임’은 다른 제작사나 연출자에게서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여정을 통해 이 답에 가까이 접근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