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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PD Mar 23. 2024

배우가 이름을 불릴 때.

드라마에는 포졸 1,2,3이 나온다. 그들은 행인 1,2,3일 수도 있고, 기자 1,2,3일 수도 있다. 많은 배우가 그들의 경력을 이와 같은 1,2,3,으로 시작한다. 이름조차 없는 배역이지만 엑스트라는 할 수 없는 배역이다. 더 큰 배역을 위해서, 또는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간단한 대사이지만 그들은 그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아마도 그 배우는 긴장은 하겠지만 신나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사소한 역할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짧은 대사 한 마디를 소화 못해서 NG가 나는 경우가 있다. 워낙 짧으니 암기의 문제가 아니겠지만, 현장에서 주는 중압감이 배우를 어둡고 깊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적은 역할 때문에 현장의 진행이 더뎌지고 모든 사람의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하물며 그 적은 역할을 맡은 배우는 어떤 심정일까? 왜 이 적은 배역을 하겠다고 나섰는지 그 배우는 마음속 깊이 원망이 타 오를 것이다. 


캐스팅하기 곤란한 배역이 있다. 

이를테면 연쇄 살인범의 희생자가 되는 여자 배역이었다. 대사가 없었다. 포박 당한채 약물을 투여받으면서 황홀경에 빠지며 의식을 잃는 역할이었다. 하필이면 이 연쇄살인범은 비 오는 수요일 밤에만 범행을 저질렀고, 하필 추운 겨울이었다. 촬영 장소는 더구나 지방이었다. 어느 여배우가 그 역할을 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고, 멋지게 연기를 보여주었다. 촬영을 마치고 인사하러 분장차에 들어가 보니, 그 배우는 벌써 현장을 떠난 뒤였다. 그 장면을 찍을 때 한 다큐멘터리 PD가 촬영을 했는데, 그 여배우에게 힘들지 않으냐고 질문하는 장면이 들어있었다. 그 여배우는 싱긋 웃으며 '배우잖아요, 해야죠'하고 대답했다. 나는 아직 그녀를 기억한다. 그녀가 점점 비중 있는 역할로 옮겨가는 것을 보면 반갑기 이를 데가 없다. 언젠가 현장에서 다시 만나 비 오는 수요일 겨울밤, 지방에서 찍은 장면을 함께 되새길 날이 오길 바란다.


또 다른 배역은 매춘부 역할이었다. 특별한 대사도 없고 입대하는 남 주인공과 단 하루 짧은 인연을 쌓는 역할이었다. 이런 역할을 엑스트라를 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어느 배우가 이런 역할을 기꺼이 맡아서 할 것인가? 대본이 늦게 나와 급박하게 촬영을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어찌어찌 여배우를 캐스팅해 쉽게 촬영을 마쳤다. 그녀는 이제 배우의 삶을 접고 주부로, 엄마로 살아간다. 이제 두 아이의 엄마로 가정을 꾸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위안을 얻는다. 이제 현장에서 그녀를 만날 일은 없지만, 그녀의 안부 포스팅은 항상 내 '좋아요'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역할을 잘 마무리해 준 여러 배우 덕에 연출자로서 나의 삶이 오랜 시간 이어졌다. 조단역 배우는 역할은 적어도 드라마에서 디테일에 해당한다. 주조연 배우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큰 파도를 일으킨다면, 조단역 배우는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채우고 흠집을 메워나간다. 잘하기는 어렵지만 잘못하면 티가 나는 역할이다. 이 또한 배우가 채워나가줘야 한다. 


배역에서는 이름이 없지만, 난 현장에서 그 배우의 이름을 부르려고 한다. 대본에서 이름을 주지 않았지만, 연출은 이름을 불러주어야 배우는 꽃처럼 피어난다. 다행히 그 배우의 공연이나 전작을 본 적이 있다면 그 얘기를 꺼내본다. 감독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배우는 자신감을 회복한다. 작은 역을 연기하는 그 배우는 큰 배우로서 평정을 찾는다. 작가가 텍스트로서 배려를 못한 배역이지만, 연출자로서 배려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간혹 여유가 있을 때는 한 번 배역에 '퍼스낼러티'를 넣어보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한 후 밋밋한 '행인 1'이 '충청도에서 올라온 취객'으로 변해 재미있는 감초 연기로 신을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을 많이 보았다.  배역의 이름이 없을지라도 배우의 이름은 있다. 


배우는 이름을 불릴 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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