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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공부하는 것

by 용PD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요즘은 AI 활용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가 교정의 새 화두다. 허락하는 사람도 있고, 단호히 금지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허용하는 쪽이다. 쓰지 말라고 해도 몰래 쓸 게 뻔하고, 그럴 바엔 제대로 쓰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경고처럼 말했다. “AI를 쓰는 건 좋지만, 그만큼 기대 수준이 올라간다는 걸 알아야 한다”라고.


최근 대학가가 술렁였다. 연세대의 한 대형 강의에서 수백 명이 시험 중 AI를 사용하다 적발됐다는 소식이었다. 고려대, 서울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이어졌다고 한다. 놀라운 건 그 후의 풍경이다. 학생들 사이에선 “나만 안 쓰면 손해”라는 말이 공공연히 오갔고, 익명 설문에서는 절반 가까이가 “커닝했다”라고 답했다. 교정의 공기가 달라졌다. “AI를 썼느냐”보다 “왜 안 썼느냐”가 더 어색한 질문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러 학생의 과제를 받아보면 ai의 도움을 받은 것이 감지된다. 과제 답안이 모두 비슷하고, 비슷하게 틀린다. 출처를 제시하라고 한 후 출처를 조사해 보면 연결이 되지 않거나, 출처가 잘못된 경우가 많다. ai의 할루시네이션 에러가 걸러지지 않고 제출한 것이다.


돌아보면 대학의 공부란 단순히 성적표에 숫자를 채우는 일이 아니었다. 알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펴고, 논리를 세우며, 스스로의 생각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AI가 만들어준 답안을 복사해 붙이는 데 그친다. 그 순간, ‘배움’이라는 단어가 희미해진다.


AI는 그 과정을 통째로 건너뛴다. 학생이 생각하는 법을 잊게 만드는, 그 눈에 띄지 않는 생략이 문제다.


AI 의존 학습의 문제는 단순히 부정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첫째, 사고의 깊이가 점점 얕아진다. 개념을 ‘이해’하는 대신 결과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다.
둘째, 정보의 정확성이다. 틀린 답을 믿고 배우는 일이 흔하다.
셋째, 관계의 단절이다. AI가 대화를 대신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부딪치고 나누는 시간이 사라진다.


OECD의 한 연구에 따르면, 컴퓨터 사용이 일정선을 넘으면 오히려 학생의 읽기 성취도가 떨어진다고 한다(OECD, 2015). 기술이 언제나 학습의 편이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뒤늦게나마 대학이 대응을 시작했다. AI 탐지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윤리적 기준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어떤 교수는 강의실 안에서 손으로 쓰는 시험을 되살렸다. 다른 교수는 구술시험을 도입했다.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AI는 부정할 수 없는 도구다. 그러나 그 도구가 우리의 ‘생각’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어떤 태도로 쓰느냐다. 스스로의 사유를 먼저 세우고, AI가 도운 부분을 솔직히 밝히며, 그 안에서 어떻게 확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AI의 답조차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판단하고 비교하며, 논리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그 과정이 바로 공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학생들에게 인터넷 검색이나 AI가 틀린 답을 내놓을 만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대다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제출했다. 자신이 쓴 문장을 곱씹어보지 않았다. 배움이란 결국 ‘곱씹는 일’이라는 걸 잊은 것이다.


대학은 지식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다.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곳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 근육은 인간만이 만든다. 대학이 깨어야 한다는 말은, AI를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다. 이 시대의 배움은 AI와 함께 살아가되, 스스로의 생각을 잃지 않는 데 있다. 그것이 대학의 자존심이자, 배우는 이의 품격이다.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2015). Students, computers and learning: Making the connection. OECD Publishing. https://doi.org/10.1787/9789264239555-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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