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한인사의 출발지
글: 채인숙(시인)
자카르타 서부의 글로독(Glodok)은 17세기부터 청나라에서 이주해 온 상인과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고 대표적 상업지였다. 설탕 공장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바타비아(Batavia, 현 자카르타)로 이주한 많은 중국인들이 글로독에 정착하면서 빠사르 쁘찌난(Pasar Pecinan, 중국인 상업지)으로 불리었다. 지금은 과거의 부흥이 무색할 만큼 쇠락한 외경으로 옛 명맥을 유지할 뿐이지만, 1980년대까지도 전성기를 구가하며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인도네시아 한인사의 뼈아픈 출발을 함께 한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인도네시아에 발을 디딘 최초의 한국인으로 알려진 ‘장윤원’ 선생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글로독 형무소에 갇혔던 비극적인 역사가 숨겨진 곳이기 때문이다.
장윤원 선생은 3.1운동 당시 근무하던 은행의 돈을 빼돌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1920년, 중국을 거쳐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자바 땅에서 삶을 꾸린 최초의 한국인으로 기록된 그는,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서 중국계 여인과 결혼해 2남 3녀를 두고 네덜란드 총독부의 일본어 담당 수석고문관으로 일하며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악몽처럼 일제가 인도네시아마저 지배하게 되었고, 그는 끝내 일본군에 붙들려 온갖 고문에 시달리며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군 포로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채 거리를 행진하는 수모를 겪으며 글로독 형무소에서 스트루스윅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억압을 피해 먼먼 자바까지 홀로 왔으나 가혹한 운명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 네덜란드 군 포로가 그린 옛 글로독 형무소 (출처:구글이미지)
마침내 해방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세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당시 글로독 주변의 꼬따에서 조선인민회가 결성되었고, 인도네시아로 징용을 당해 온 조선인들이 주택 몇 채를 빌려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제가 패전을 선언하고 네덜란드가 다시 자바로 진격해 들어오기 전 약 7개월여 동안, 이곳은 조선인들의 해방구였다. 조선어 교실이 열리고, ‘조선인민회보’라는 등사판 신문이 만들어지고, 양재 기술을 가르치는 여성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극장이 만들어져 연극을 공연하고, 조선 무용과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 때 장윤원 선생은 ‘재 자바 조선인민회’가 만들어지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 옛 글로독 풍경 (출처:구글이미지)
그리고 네덜란드 군이 다시 들어오면서 군무원으로 일했던 조선인들이 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거나 심지어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장윤원 선생은 그들의 구명을 위해 진정서를 내고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뒤를 돌보는 아버지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젊은 조선 청년들이 전범 재판을 받기 위해 글로독 형무소와 찌삐낭 형무소에 다시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하며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마침내 1947년 11월 23일, 모질고 한 많은 65년의 인생을 자카르타에서 마감하였다.
▲ 장윤원 선생의 가족사진 (출처: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
나는 오래 전에 인도네시아 초기 한인사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장윤원 선생의 막내 따님인 장평화 선생을 여러 번 뵌 적이 있다. 장윤원 선생이 옥살이를 하던 중에 태어난 막내딸을 위해 “내 평생에는 평화가 없었다. 내 딸은 내가 누리지 못한 평화를 누려야 한다”며 직접 ‘장평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지만 오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셨고, 그 이야기를 부군인 여한종 전 파푸아뉴기니 대사님과 함께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말년에 치매를 앓으시다가 안타깝게도 두 분 모두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셨다.
가끔 한국에 가면 분당에 있는 장평화 선생 자택을 방문해 담소를 나누었다. 따뜻하고 유쾌한 분이셨다. 한국어로는 원하는 이야기를 속 시원히 할 수가 없다며 중간중간 영어로 이야기를 이어 가셨는데, 영국식 발음이 근사하게 들린다고 말씀드리면 수줍게 웃으셨다. 근처 식당에서 따끈한 국밥을 사주시고 이런저런 가족사와 두 분의 연애사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또한 장윤원 선생의 차남 장순일 선생은 인도네시아 최고의 카톨릭 사립대학으로 손꼽히는 아뜨마자야 대학교(Universitas Atma Jaya)를 설립한 공동설립자 3인 중의 한 명이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장윤원 선생과 그 자손들은 인도네시아 한인사에서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다.
▲ 아뜨마자야 대학교 (출처: 구글이미지)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한 세기가 흘렀지만, 일제 강점기는 마치 현재진행형의 역사처럼 사라지지 않은 상처와 많은 문제들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그 아픈 역사의 어느 한 켠에서 인도네시아 한인사도 함께 시작되었다. 장윤원 선생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평화’는 우리가 상상조차 못하는 고통의 시간들을 통과해 우리에게 이어졌다. 그 시간의 이야기들이 묻혀있는 곳이 글로독과 옛 꼬따 지역이다. 우리에게 글로독은 단순히 중국인 상업지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한인사의 출발지로 새롭게 기억되어야 할 곳인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 적도에 묻히다/우쓰미 아야꼬. 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김문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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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인도네시아 문화와 예술에 관한 글을 쓰며,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에서 활동한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채인숙의 매혹의 인도네시아>로 격주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