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독립청년당과 암바라와 의거 1
글: 채인숙 (시인)
암바라와를 여행한 적이 있다. 애초의 목적지가 그곳은 아니었다. 보로부두르 사원이 있는 마글랑에서 중부 자바의 항구 도시인 스마랑을 오가며 자동차 여행을 하던 중에 암바라와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운전을 도와준 현지인이 암바라와의 성지로 불리는 마리아 동굴(Gua Maria Kerep)이 근처에 있다고 알려 주었고, 잠시 기도를 바치고 가자는 생각으로 언덕을 올랐다. 그런데 마리아 동굴 주변은 마치 관광지처럼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복잡한 그곳을 빠져나와 바로 아래 큰길 가에 있는 한적한 성당을 찾아 들어갔다. 그곳이 성 요셉 성당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되었고,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소름이 돋는 듯한 감흥에 젖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놀라운 우연이었다. 첨탑의 작은 십자가를 보자마자 나는 몇 년 전에 읽었던 우쓰미 아이코 교수의 <적도 하의 조선인 반란>이라는 책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바로 그 성당임을 눈치챘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야말로 우연히 들른 그 성당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군무원들이 조직한 고려독립청년단이 암바라와 의거를 일으키고 자결한 ‘자바 포로수용소-억류소 스마랑 분소 제2분견소 제1억류소’였던 것이다.
당시 암바라와에는 자바섬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인 부녀자들과 민간인들을 억류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 적잖은 수의 조선인 군무원들이 억류소에 근무하고 있었고, 그 중에 고려독립청년당 당원들이 있었다. 나는 7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조선의 청년들이 낯선 남방의 섬나라로 끌려 와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아들에게 이야기해 주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성당 마당과 뒤편의 창고, 그리고 성당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 암바라와 성 요셉 성당
1942년 8월 19일 밤. 1,400여 명의 조선인 징용자들을 태운 6천톤 급의 브리스베인 호와 10여 척의 화물선이 부산항을 출발했다. 브리스베인 호의 어두운 짐칸에 앉아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항해를 계속하던 조선인 징용자 중에 ‘이억관’이라는 27살의 청년이 있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하급 공무원으로 서대문형무소 간수로 일하면서 민족운동가들의 외부 연락원 역할을 자처하였다. 누군가의 밀고로 활동이 들통나자 중국 동북 지방으로 도망을 갔고, 스스로 신변을 보호할 목적으로 군무원에 지원하면서 브리스베인 호에 올랐다. 그는 배 안에서 ‘고려독립청년단’을 결성할 목적을 세우고 마음이 통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25일이 지난 후 그들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딴중쁘리옥 항구에 닿았다. 바타비아가 자카르타로 수도의 이름을 바꾼 지 한 달이 지난 때였다. 그들은 자바 포로수용소에 있는 8만 여명의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군무원으로 배치되었다. 이미 동남아를 장악한 일본군에게 홍콩과 말레이를 비롯하여 26만 명이 넘는 전쟁 포로들을 처리하는 일은 큰 골칫거리였다. “살아서는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죽어서는 죄인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교육을 받으며 패배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일본군들은, 적군에게 항복하며 수용소에 모여든 엄청난 수의 포로들을 보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남방에서의 포로 처리 요령의 건’이 지침으로 내려왔고,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괴롭히는 악역을 대만인과 조선인 군무원들에게 떠맡겼다.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 일본식 이름을 가졌던 수많은 조선인 군무원들이 전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투옥되거나 심지어 사형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국에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품은 ‘고려독립청년당’이 인도네시아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 이억관: 고려독립청년당 결성
(2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 자료 및 인용: 적도 하의 조선인 반란/우쓰미 아야꼬 지음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김문환 지음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인도네시아 문화와 예술에 관한 글을 쓰며,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에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