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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인숙 May 16. 2019

암바라와 편지  2

고려독립청년당과 암바라와 의거 2 

글; 채인숙(시인)



딴중쁘리옥 항구에 도착한 조선인 군무원들은 포로수용소가 있는 인도네시아 곳곳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자바 섬에는 자카르타, 반둥, 찔라짭, 말랑, 수라바야 등 5군데에 수용소가 있었고, 그 외 많은 지역 분소와 억류소가 있었다. 이억관은 자카르타 본소에서 사무 일을 하면서 당을 조직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각지로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4년 12월 29일 웅아란(Unganran) 산의 스모오노 연병장에서 군사 기강이 해이해진 조선인 불순분자 200여 명을 집합시켜 군사 훈련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재교육 대상이 아님에도 자의로 훈련에 지원한다. 



이억관은 스모오노로 떠나기 전부터 이미 당을 조직하여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 치밀하게 계획해 놓았다. 미, 영, 중 3국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표한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고, 패색이 짙어진 일본을 상대로 연합군이 다시 자바 상륙을 개시할 것임을 예측했다. 그는 연합군이 상륙하면 포로들과 협력해 후방에서 일본군을 교란시키고 그들의 전투를 도울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 각 수용소의 조선인들을 연결하고 반일 감정을 가진 중국인들과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연대도 준비하였다. 



마침내 스모오노 연병장 취사장에서 ‘고려독립청년당’ 혈맹당원 10명이 모였다. 이억관이 먼저 왼쪽 새끼 손가락을 베어 “고려독립청년당 혈맹동지‘라는 글귀를 썼고, 뒤이어 각자의 이름을 혈서로 남겼다. 훈련 틈틈이 연습한 당가를 함께 부르고 당의 총령으로 선출된 이억관이 당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암호는 “높다”라고 말을 걸면 “푸르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날 이후 조직 당원이 점점 늘어나 전체 당원은 26명에 이르렀다. 



▲ 사진1. 고려독립청년당이 결성된 스모오노 연병장 취사장



1945년 1월 4일. 암바라와에서 근무하던 고려독립청년단 손양섭, 민병학, 노병한에게 아무런 예고없이 싱가포르 전속 명령이 떨어진다. 이미 2년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날짜를 기다리던 차에 오히려 전속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특히 암바라와에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던 민영학은 극도로 흥분하며 격앙된 감정을 표출했다. 급기야 세 사람은 항구로 가는 도중에 군부대 트럭을 점거하고 부대로 되돌아가며 “왜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억류소로 돌아온 세 사람은 보초병을 위협하여 경기관총과 한 자루와 소총 세 자루, 2천 발의 총탄을 들고 나와 총격전을 시작했다. 일본인 군수품 납품업자의 집으로 찾아가 손양섭이 총을 쏘았고, 노병한이 형무소 소장을 찾아가 방아쇠를 당겼다. 쫒고쫒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동안 일본인 장교와 하사관을 비롯한 수십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 와중에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상사의 총탄에 다리를 맞은 민영학은 자신이 동료들에게 짐이 될 것을 우려하며 “나를 포기하고 가라”는 말을 남기고 옥수수 밭에서 자결하였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스마랑에서 일본군 진압대가 파견되었다. 노병한과 손양섭은 억류소의 위생창고에 급히 은신하였다. 억류소에는 조선인 군무원들이 많았다. 그들은 서로 위치를 알려 조선인끼리 살상을 피하고 두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를 덜어내 주려는 심산으로 일부러 큰 소리로 조선 말을 하며 떠들어 대었다. 몇몇은 이미 손양섭과 노병한이 위생창고에 숨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 사실을 일본군에게 알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사흘 뒤 조선인 군무원 동료 20여 명이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 손양섭과 노병한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두 놀랐지만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고려독립청년당 동지인 조규홍에게 담배 한 대를 청하여 피운 뒤, 손양섭은 이와나미 문고판 책 한 권을 건네며 자카르타에 근무하는 고향 친구 박승욱 동지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평소 즐겨 읽던 니체의 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자결할 것임을 알리고 총소리가 나면 놀라는 척하며 달아나라고 이야기한다. 창고로 돌아간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고려독립청년당 당가를 불렀다. 조선인 군무원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위생창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두 발의 총성이 연이어 울리며 손양섭과 노병한의 죽음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이억관 총령은 이 사건을 ’고려독립청년단 1차 거사‘로 규정하고, 곧이어 싱가포르로 군무원들을 강제 차출하는 ’스미레호‘ 수송선을 탈취할 2차 거사를 계획한다. 그러나 두 번째 거사는 누군가의 밀고로 미처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 채 실패하였다. 곧 일본이 패전하였고, 자카르타에 모인 당원들은 이상문 당원이 수습해 온 세 사람의 유골을 모시고 ’재자바 조선인민회‘의 이름으로 1주기 위령제를 올린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고려독립청년당은 정식 해산하였다. 당시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은 자바의 ‘고려독립청년당’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친서와 태극기를 보내왔고, 이 태극기는 조선인민회 정문에 게양되어 있었다. 



▲ 사진2. 고려독립청년당 마지막 혈맹단원 이상문. 직접 3인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 사진3. 고려독립청년단 암바라와 의거 3인의 위령제 (1946. 1.6)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들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작은 의무감으로 3월 한 달 동안 인도네시아의 고려독립청년당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을 울렸던 건, 목숨을 내건 항일 투쟁이나 애국심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적도의 섬나라에 몸과 영혼을 묻어야 했던 그들이, 내 아들보다 겨우 서너 살 남짓 많은 청년이었다는 사실이 못내 쓰라렸다. 젊은 그들에게는 조국에 두고 온 어린 아내가 있었고, 암바라와에서 만난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을 것이다. 억류소 낮은 등불 아래서 니체의 책을 읽던 손양섭은 혹시 그 책이 고향 친구의 손을 통해 사랑하는 여인에게 전해지길 바랐던 건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때마침 한국에서 날아온 시 청탁서를 받아들고, 나는 손양섭의 마음으로 한 장의 편지를 시로 썼다. 부족한 시 한 편을 말미에 보탠다.   *자료 출처 및 인용: 적도에 묻히다 / 우쓰미 아야꼬, 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암바라와* 편지


시: 채인숙




 계절이 하나밖에 없는 건 계절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오



 여름 끝에 출발한 브리스베인 호는 스물닷새 망망대해를 지나 여름이 지나도 또 여름이 온다는 남방의 섬나라에 정박했소   



  붉은 땀으로 얼룩진 적도선을 넘어 불시착한 여행자의 집은 언제라도 무너질 준비를 하고 있었지 나는 그 집을지키는 이방의 서러운 문지기가 되었다오



 어제는 암바라와 밀림에 피는 나무꽃의 이름과 식량배급소 낡은 라디오에서 들었던 축축한 음악을 당신에게 들려주는 짧은 꿈을 꾸었소 



 당신은 무사하오?

 나는 꿈속에서 되풀이해 물었소 



 당신은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구려

 그래서 묻는다오

 당신은 무사한 거요? 



 나는 날마다 배가 고프고 눈 내리던 겨울숲 길 잃은 고라니의 눈동자를 생각하오 대나무 줄기로 엮은 수용소 담벼락에 기대서서 낮은 허밍으로 그 울음을 되뇌이지 



 청빛의 직녀성에서 퍼지던 음악도

 혈맹의 핏자국을 씻어내리는 빗소리도

 당신의 눈물 한 방울보다 무겁진 않구려 



 세상을 모두 채우는 이름을 가진다는 건 두렵고 허기진 일이오 



 암바라와로 편지를 보내주겠소? 






*1942년 9월 14일, 일제하의 조선인 군무원 1400명이 자바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차출되어 자카르타 딴중쁘리옥 항구에 도착했다. 조선인들은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고, 그중 암바라와 수용소에 배치된 3인이 1차 반란을 일으킨 후 조직의 내부가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자결하였다. 그들은 끝내 조국에 두고 온 연인과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인도네시아 문화와 예술에 관한 글을 쓰며,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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