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서로를 알아보겠지요.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시/채인숙
죽은 자와 산 자가
한 지붕 아래 동거하는 섬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당신은
오래 쓴 시를
숨어서
읽고 있었습니다
혼자 쓰고
혼자 지우는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은
늘 등이 굳어있고
매사 다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쓰다가 멈춘 문장을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검은 모래 해변을 함께 걸으며
저녁이 오면 세상의 온갖 색을 거두어들이는
빛의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죽고 싶냐는 질문을 한 적은 없지만
시인은 죽어가는 얼굴을 붉게 감추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시는 희망이 있는 걸까요
주목나무 아래 앉아
우리가 함께 읽지 못한 시를
혼자 낭독합니다
우리의 낭독회는
아무 관객이 없고
죽은 당신만이
박수를 쳤습니다
(사진=조현영)
<우리는 다시 서로를 알아 보겠지요>
글/ 채인숙(2021 시와경계 김길녀 시인 추모 특집)
며칠 섬에 다녀왔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지 두 달여가 지나 겨우 서울을 벗어날 수 있었어요. 제가 태어난 남해안의 작은 섬은 뱀이 많아 ‘사량도’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저는 그 섬에 아직 도로가 놓이지 않고 전기가 들어오지도 않았던 옛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여름이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캄캄한 밤 선창에 누워 바다 위로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를 보았지요. 그 어린 날의 기억은 이국을 떠돌며 외롭고 팍팍한 삶과 대면해야 하는 순간마다 나를 다독이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자연에서 나를 발견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경외를 잊지 않아야 한다구요.
사량도에서 내내 죽음을 대하는 선생님의 자세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인도네시아에서 길리낭구 섬과 따나또라자로 여행을 다녀오신 후에 삶과 죽음이 그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아무렇지 않게 뒤섞여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일렁이는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숨바 섬의 어느 종족은 사람이 죽으면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엄마의 자궁 안에 있던 모습 그대로 항아리에 넣어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또라자에선 장례 비용이 마련될 때까지 손으로 짠 이깟 천을 덮어 집안에 시신이 그대로 누워 지내게 합니다. 몇 년이 지나도록 망자와 일상을 함께 하는 경우가 흔하다지요. 술라웨시에선 태어난 지 채 일년이 되지 않은 아기가 죽으면 커다란 나무 줄기 가운데를 파서 아기 무덤을 만들어 줍니다. 아기는 나무 속에서 나무와 함께 살아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어미나무라 부르지요. 우리는 그때 꽤 오랜 시간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시 각자의 책상으로 돌아가 시를 썼습니다.
인도네시아엔 300여 종족이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으니, 아마 장례의 방식도 300여 가지는 넘을 것이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방식들 가운데 어떤 것이 선생님 마음에 들어와 있었던 걸까요. 아무에게도 죽음을 알리지 말고, 빈소도 차리지 말고, 조의금도 받지 말고, 그저 남편과 자식들만 지켜보는 가운데 주목나무 아래로 들겠다는 간절한 유언을 남기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살아 생전 선생님의 평소 모습처럼 죽음도 그리 깔끔하고 단정하게 맞으셨구나 생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실은, 꼭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주변을 정리하고 가셔야 했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한국에 나와있는 동안 선생님과 저는 세 번 정도 통화를 했고, 어떤 다른 기미도 느끼지 못할 만큼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으니까요. 심지어 믿고 따랐던 누군가의 예기치 못한 행동을 흉보는 제 이야기를 듣고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셨잖아요. 생각해보니, 우리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어요.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무조건 상대방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무엇이 잘되었고 잘못된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서로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에도 선생님은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계신 중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장례를 치룬지 이미 열흘이 지났다고, 정리가 끝난 한참 후에나 주변에 알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고, 아내가 채시인을 무척 좋아했고 늘 고마웠다는 말을 전해달라 했다는 부군의 메시지를 받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나눈 세 번의 통화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지난 2월 한국에 나오자 마자 저와 선생님과 인도네시아의 시인들이 2년 여의 준비를 거쳐 함께 만든 시집이 출간되었고, 우리는 서로 수고했다 격려하며 자축의 인사를 나누었어요. 선생님은 역병을 피해 밀양의 사과밭에 칩거 중이라 했습니다. 아파서 거기 계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얼른 사과밭 오두막에서 나와 축하 파티도 하고 자카르타로 가서 낭독회도 열자고 철없이 졸랐습니다. 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에 요청해서 덜컥 낭독회 날짜를 잡아놓기까지 했어요. 선생님은 그래야죠, 그래야죠.. 하면서도 명확한 대답을 않고, 그저 채시인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만 반복하셨어요. 평소와 달랐던 그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한 무디고 어리석은 스스로가 원통할 지경입니다.
우리가 자카르타에서 함께 어울렸던 시절, 오래 앓아온 병이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고 선생님은 누구보다 활기찼습니다. 조금의 틈만 생기면 어디로든 떠나려고 하셨지요.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늘 길 위에 서 있었고, 족자카르타와 브로모와 따나또라자와 길리의 섬들을 떠돌았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것들을 글로 적기 위해 주저없이 골방으로 숨어들었지요. 우리는 틈틈이 함께 여행을 다니고, 인도네시아의 시인들을 만나기 위해 같이 길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고백컨대, 저는 선생님을 만나면서 20여년 동안 혼자 쓰고 혼자 지우며 오래 묵혀 두었던 시 파일을 세상 밖으로 꺼내 놓을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자 마자 단번에 ‘알아보았다’고 말씀하셨지요. 방송작가로 밥벌이를 하다가 20대가 끝날 즈음 한국을 떠났고 이제 곧 자카르타에서 50대를 맞이하려는 동안까지 숨어서 혼자 시를 쓰고 있는 저를 눈치 챈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어쩐지 별 망설임이나 부끄럼도 없이 제 시를 곧잘 선생님께 보여드리곤 하였지요. 선생님도 어떤 글을 쓰고 있고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있는지 털어놓으며 의견을 구하곤 하셨습니다. 우리는 장대한 밀림과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적도의 섬나라에서 참으로 예민하고 미세한 줄로 서로에게 닿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연결점의 가느다란 떨림이 언제나 좋았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6월 어느 날 자카르타의 한국문화원에서 인도네시아 시인들과 우리의 시집 <라라종그랑>을 함께 읽는 낭독회를 예정대로 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인도네시아 어로 읽어달라 당부하셨던 선생님의 시는 라뜨나 로히만과 김현숙 시인이 돌아가며 읽었습니다. 시를 낭독하는 것부터 우리는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앞으로의 일들을 놓치지 않고 해 나가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김길녀의 방식’으로 그토록 의연하고 깨끗하게 병과 죽음을 맞이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선생님을 추억하고 시를 쓰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음 생에도 찌레본 해안가에서 뜨거운 밀랍을 부어 큰 구름과 파도 문양 바틱을 그리며 마주 앉거나, 모든 문명을 거부하고 해가 뜰 동안에만 검은 베를 짜는 바두이의 여인이 되어 다시 만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때는 제가 먼저 선생님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주목나무 그늘 아래에서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