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영화인 줄 알고 가볍게 한 편 보자 했는데 드라마였다. 열다섯 편이나 되는데 재밌어서 3일 만에 다 봤다. 입소문으로 흥행에 꽤 성공한 모양이다. 연일 각종 리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거기 살짝 합류하려 한다. 드라마를 보던 중에도, 보고 난 후에도 생각이 많아지는 내용이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소울메이트같은 절친이 일생에 걸쳐 미움의 대상이기도 하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한 복잡한 감정을 다룬 드라마이다. 여자애들은 한 명쯤 마음에 묻어 둔 애증의 친구가 있다. 남자친구보다 더 일찍이 전화기를 뜨겁게 만들던 친구들. 그들로부터 제일 크게 상처받고 제일 크게 위안을 얻었다.
우리나라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단짝을 만들거나 소수의 그룹을 만들어 지내는 데 익숙하다. 그 과정에서 친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독점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사소한 일로 미묘하게 빈정이 상하거나 질투 어린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친구를 미워하는 동시에 동경하기도 한다.
그런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작은 행동이나 표정을 통해 수동적인 공격을 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삐죽 대는 말을 한다. 둔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대가 이상함을 감지하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갑자기 다시 엄청 잘 해주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행동이나 말은 어릴 때 주로 나타난다.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되고 나이가 들면 그런 감정을 잘 숨기게 되고, 또 친구에 대해 그렇게 많이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이 드라마는 그런 여자애들 간의 어렵고 미묘한 감정을 상당 부분 잘 표현했다. 어렸을 때 만났기 때문인지 은중과 상연의 관계는 성인이 되어서도 애증의 감정이 깊게 얽히는 형태가 된다. 나는 이걸 중심 소재로 만든 작품을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해외 반응은 별로 좋지 않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한국인 정서에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약간의 스포 있어요)
이 드라마의 판타지는 김고은이 연기한 은중이다. 상연은 실제로 어딘가 있을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은중은 남들 같으면 벌써 절연했을 친구를 쉽게 끊어내지 않는다. 은중은 상연의 선 넘는 공격에 덩달아 있는 힘껏 맞서지 않는다. 맞서지 않는다기보다 맞서지 못하는 성격이고 기본 베이스가 정의롭고 남을 감싸는 성품이다. 은중은 상연의 한 가지에 깊게 몰입하는 능력과 냉철하고 똑 부러진 부분을 동경한다. 상연처럼 영화를 잘 알고 싶어서 영화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연의 잘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자신도 발전하고 싶어 할 뿐 그것을 빼앗으려 하지는 않는다.
한편 상연은 은중을 공격한 후에도 오히려 자신을 감싸주는 은중에게 일종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존심이 너무 세기 때문에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은중이 착한 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고 싶다. 은중이 그런 성품이라 동경하고 좋아하면서도, 결핍을 많이 안고 자란 그녀는 마냥 그 친구를 좋아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관계를 끝장내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일생 내내 은중을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마음이 괴로워 돌이킬 수 없게 관계를 깨뜨린다. 그리고 '제가 지금 얼마나 신났는지 모르죠'라고 말하는 부분은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의 홀가분한 마음을 표현했을 수 있다.
둘은 서로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의 강점을 동경하지만 차이가 있다. 은중은 상연을 동경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질투는 나의 힘'이 되어 자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활용하고, 그 친구로부터 크게 받은 상처는 스스로 삭혀서 회복할 줄 안다. 이는 내면의 중심이 바깥에 있지 않은 사람이 불행하지 않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백미는 어리석고 못된 상연을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탄탄하게 쌓아 올린 서사를 통해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입체적인 상연 캐릭터를 이렇게나 생생하게 표현한 박지현의 연기는 정말 살벌하게 좋다. 태생이 예민하고 편애적인 사랑을 원하는 아이가 그것을 결국 얻지 못했을 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잘 표현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소재여도 설득력이 받쳐 준다면 좋은 영화가 되고 드라마가 된다. 악역으로 볼 수도 있는 상연 캐릭터가 마음에 잘 와닿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수작이라 생각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다들 그랬겠지만 나도 나의 상연이나 은중이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은중이라고 하기엔 마음이 좁아서 어떤 상연이도 친구로 남기지 못했다. 나의 상연이들은 주로 내 단짝 친구를 빼앗아갔다. 경험상 셋이 놀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굉장히 위태로워진다. 처음 친구를 빼앗겼을 때는 엉엉 울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조금만 그런 낌새가 보이면 일찌감치 먼저 손을 놨다.
예쁘고 성격도 좋은 상연이들은 처음엔 내가 너무 좋다며 아주 살갑게 다가오지만 결국엔 내 마음을 폐허처럼 만들어 놓곤 했다. 어떤 상연이는 자기 집에 나와 내 절친을 초대해서 일부러 나에게만 손 닦을 곳을 미리 안내하지 않았다. 화장실에 걸려있던 수건을 쓰고 나오니 '앗 그거 발 닦는 수건인데!' 하던 그 친구는 참 기억에 오래 남는다. 어떨 땐 쪽지로 '내숭 떨지 마' 같은 말도 보내곤 했다. 난 그때 내숭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굉장히 궁금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많은 상연이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처음부터 살갑게 다가오는 여자 사람은 좀 경계할 정도였다.
친구를 좋아하면서도 질투하는 부분만 놓고 보면 나도 상연이었던 적이 있다. 나는 대가 약해서 주로 지는 쪽이었지만 중학생 때 그림을 나보다 잘 그리던 한 친구에게는 종종 볼멘소리를 했었다. 그 친구가 나랑만 붙어 다니는 것이 기쁘면서도 그림 실력이 샘이 났다. 네 그림체는 너무 날카롭다고 하고, 그림만 그리지 말고 공부도 좀 해야 한다 같은 말을 했다. 그 친구는 그림 그리는 쪽으로 진학했고 나는 그때 그림으로 뭘 할 생각을 접었다. 그 친구만큼 잘 그릴 수 없어서 앞으로도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 애를 정말 좋아했는데 분야가 달라지면서 빠르게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에게 난 의미 있는 인물이 아니었을 수 있고, 나의 말들이 언짢았을 것이다. 그냥 너 참 그림 잘 그린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칭찬할 것을. 그랬다면 우리가 좀 더 오래 친구로 남았을텐데.
관계가 서툴렀던 시절에 만난 친구들을 떠올릴 수 있는 드라마였다. 미웠지만 사랑했던 친구들. 친구 문제 외에 떠올릴 수 있는 다른 주제들도 많다. 성 정체성 오픈 문제나, 지독한 가난, 가족, 조력자살 같은 다양하고 심오한 주제에 질문을 던진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문제들을 얘기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아니었고 그 모든 것이 꽤 연결이 잘 되는 편이다. 밝은 내용은 아니지만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은중과 상연'을 많은 사람들이 감상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상연의 마지막 편지 '나의 생애'의 일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