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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an 31. 2024

절망 없는 디스토피아

-허명행 감독의 <황야> (2024)

  영화 <황야>의 전략은 명확하다. 마동석의 <범죄도시> (2017) 시리즈와 얼마 전 주목을 받았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의 스토리를 잘 결합하여, 범죄 액션과 재난 서사에 관심이 많은 관객층의 관심을 받으려 했다는 점이다. 사실 의도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의도를 살려주지 못하는 스토리텔링과 연출이 걸림돌일 뿐이다.


  우선 이 작품은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다.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는 당대 현실에 대한 묵시록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유토피아를 향한 모험담이 주로 영웅의 실패담으로 끝나지만, 디스토피아를 향한 작품들은 폐허의 사회를 경유해 다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이야기로 끝맺는다.


  대표적으로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2015)를 예로 들 수 있다. 임모탄이 지배하는 세계를 거부하고, 맥스와 퓨리오사가 다시 도망 온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되돌아가 그곳을 임모탄의 독재로부터 해방시키는 방식은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서사라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현실 사회의 원리에 대한 거부와 미래를 향한 유토피아적 희망이 함께 결합하고 있다.


  하지만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모두 그 밑에 유토피아적 희망을 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멸의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영화 <콘트리트 유토피아> 혹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1978) 등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결말에 황궁 아파트의 구성원들이 바퀴벌레로 명명되는 외부인들에 의해 함락되며 끝나고, <죽은 시체들의 밤>은 생존을 시도한 사람들이 결국 인간에 의해 좀비로 사냥이 되고서야 끝난다. 이러한 방식은 현실 사회에 대한 환멸의 정서가 강하게 토대하고 있는 경우라고 하겠다.


  영화 <황야>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강렬한 생존 욕망이 전면화되지 않는다. 보통 재난물의 빌런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환경적 요소들이다. 예를 들면 건물과 같은 구조물이나 척박한 자연환경 그리고 이성을 상실한 인간의 생존 욕망이다. 하지만 영화 <황야>에서는 척박한 환경이 주는 고난이 마동석이 연기하는 사냥꾼의 선의에 의해 해소되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마동석이 연기한 사냥꾼이라는 캐릭터의 영웅적 속성을 강화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사냥꾼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부 측 사람들에 의해 마을 사람들이 납치되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정부의 군사 시설까지 침투한다. 사냥꾼에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기 보존의 욕망이 우선하지 않는다. 이것은 범죄도시에서 “나쁜 놈들은 그냥 잡아야지!”라고 말하는 마석도 형사의 세계관을 그대로 옮겨 놓았음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디스토피아라는 시공간의 특성이 환경으로 작용하지 않고 배경으로만 남겨진다.


  여기서 배경이란 단순히 사건이 벌어지는 시공간을 의미한다면, 환경은 인물들의 사고와 선택을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시공간적 조건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황야>의 지향점은 디스토피아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마동석의 <범죄도시>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사냥꾼이 적들에게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있는데, <범죄도시>의 익숙한 코미디의 요소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문제는 이것이 마동석이 배우로서 지닌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패턴화하여 소모하고 있다는 점이고, 액션의 연출마저도 B급에 가깝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실소했던 부분은 마동석이 적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과 적들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 작품의 완성도를 의심스럽게 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디스토피아와 다름없는 세계에도 정의는 필요하다는 것이리라. 이 작품이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가장한 유토피아적 세계인 이유는 샤냥꾼 마석도에 의해 정의가 구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로운 세상을 지금의 현실에도 꿈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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