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의 엥겔 지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식당이며 카페는 테이크 아웃밖에 되지 않는다. 옷이나 신발을 마지막으로 사 본지도 일 년은 되었다. 쓰는 돈이라곤 오직 월세, 보험료와 통신료뿐. 그 외에는 모조리 식비로 사용된다. 한국만큼은 아니더라도 독일에서도 배달 대행 서비스를 통해서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피자를 시켜 먹는 것이 전부이니, 지출되는 식비의 90퍼센트 이상은 마트에서 직접 사 오는 식재료 값이다.
처음 독일로 왔을 때 우리는 두 달간 베를린의 서쪽 끝 슈판다우에서 머물고 있었다. 십분 걸어서 슈판다우 역 쪽으로 가면, 쇼핑센터 지하에 큰 마트인 레알이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이마트 매장 중 식료품을 파는 층 정도 될 법한 크기의 대형 매장을 내는 슈퍼마켓 체인점이다. 장을 보러 레알에 다녀오면 한 시간 반은 그냥 흘렀다. 모든 코너가 새로웠지만, 특히 산더미 같이 쌓인 햄과 치즈, 맥주와 와인 코너가 압도적이었다. 요구르트는 또 그렇게 종류가 많은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존재조차 모르던 시절 베를린에서 우리는 외식도 자주 했지만,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 또한 우리의 재미였다. 서쪽 끝인 슈판다우에서 남쪽 끝인 슈테글리츠로 이사 온 뒤에는, 버스로 두 정거장이면 도착하는 카우프란트에 자주 갔다. 카우프란트 역시 레알과 비슷하게 큰 규모의 매장을 내는 체인이었다. 장을 보고 오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은 그냥 흘러갔다. 우리는 언제나 등에는 백팩을 메고, 한 손에는 튼튼한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있는 쇼핑 가방을 챙겨 든 채 카우프란트에 가서 가득 사들고 돌아왔다. 그리곤 냉장고며 찬장을 가득 채운 여러 가지의 먹거리들을 흡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레알이나 카우프란트는 사실 매장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말하자면 한국의 이마트처럼, 교통의 요지에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은 자가용을 몰고 와서 산더미처럼, 정말 산더미처럼 맥주며 탄산수며 콜라며 파스타 면이나 고열 살균되어 오래 보관이 가능한 우유 같은 것들을 박스째로 사서는 트렁크를 꽉꽉 채워서 간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채며 과일이며 빵이나 고기 같은 신선 식품들은 온 김에 함께 사는 곁다리처럼 보일 지경이다. 차가 없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큰 양을 한 번에 사지 못한다. 기껏해야 맥주 여섯 개 묶음 팩이나, 아니면 오늘의 장바구니가 좀 가벼울 수도 있겠다 싶을 때 종종 1.5 리터 짜리 탄산수 여섯 개 묶음 정도만 가능할 뿐이었다.
함부르크로 이사 온 뒤 우리의 장보기 패턴은 좀 달라졌다. 외식을 하지 않게 되면서 식재료가 소비되는 속도가 몇 배는 더 빨라졌다. 그만큼 우리는 장을 더 자주 보러 가야 했다. 들고 간 가방 가득 장을 봐 와도 그걸로는 삼 사일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레알이나 카우프트란트 같은 대형 슈퍼마켓이 집 근처에 없어서, 우리는 페니와 에데카에서 장을 보기 시작했다. 가격이 저렴한 페니에서는 전투적인 마인드로 고기, 계란, 야채나 빵 같은 기본적인 식재료를 사고, 가격이 조금 더 비싼 대신 진열대가 훨씬 다양하게 채워져 있는 에데카에서는 마치 백화점에라도 온 것 마냥 우리의 미식 생활의 지평을 넓혀줄 재료들을 찾아 헤매곤 한다.
독일에서 삼 년이 넘게 살면서, 우리는 이제 독일 마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식재료들에 조금 익숙해졌다. 이제는 취향도 생겼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슈파겔보다는 그냥 아스파라거스가 더 맛있다. 모든 치즈는 다 맛있지만 연성 치즈보다는 경성 치즈가 더 맛있다. Bergkäse, 올드 암스테르담, 에다머 치즈가 맛있다. kräftig 라고 적혀있는 치즈는, 꼬린내가 심하게 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훈제 연어 중에서는 조금 더 비싸더라도 소크아이 야생 연어가 제일이다. 두께가 애매한 스파게티보다는 차라리 엄청 얇은 카펠리니나, 칼국수 면발 저럼 납작한 바페테가 맛있다. 냉동 피자는 Dr.Oetker의 라 미아 그란데가 맛있다. 웬만하면 독일 과자보다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국기가 그려진 과자를 사자. 미국 국기가 그려진 과자는 정말 정말 너무 너무 달다. 이 리스트는 아직도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최근의 발견은 블루베리맛 하퍼켁제. 기름기 하나 없이 부서지는 가벼운 식감의 과자인데, 지금까지 먹었던 모든 건강 느낌 나는 과자 중에 제일이었다.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한국 마트와 아시아마트가 있는 것도 우리의 생활의 질을 한 층 올려주었다. 한국 마트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것들은 다 갖추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라면, 장과 소스류, 콩나물이며 숙주이며 국물내기용 냉동 멸치와 냉동 만두들. 쑥갓이나 다 자란 시금치 같은 독일에서 구하기 힘든 채소들도 있다. 이곳에서 큰 맘먹고 산 냉동 명란은 우리에게 열몇 번의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한 번은 우리가 쇼핑을 마치고 문을 나서려는데 이곳을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갑자기 신 김치 혹시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좋아한다고 대답하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시고는 안쪽으로 들어가서는 소분되어 비닐봉지에 담겨있는 신 김치 한 포기를 꺼내 주시는 게 아닌가. 독일에서 김치를 구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국에 살면서 어느 식당에서든 맘껏 퍼먹으며 살던 때보다는 훨씬 귀한 몸이 된 뒤였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바로 참치 김치찌개를 끓여 먹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한국 마트에서 장을 다 보곤 가게 밖으로 나가면서 혹시나 이번에도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부르실까 매번 두근두근하게 된다.
집 근처에는 작은 아시아마트가 하나 더 있다. 우리는 종종 나나코 과일 푸딩을 사러 그곳에 들린다. 하지만 가끔, 조금 더 본격적인 아시아 음식을 해 먹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를 때는(예를 들자면 훠궈라던지 훠궈 양념을 이용한 마라샹궈 같은 볶음 요리라던지 등등) 조금 더 멀리 원정을 나가야 한다. 우리가 머물었던 베를린과 지금 살고 있는 함부르크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 중국이나 태국, 인도나 베트남 같은 아시아 나라들의 식재료를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그만큼 아시아 식재료를 파는 마트들이 많다. 버스 타고 세 정거장, 혹은 에스반으로 두 정거장을 이동해 반즈베커라는 이름의 동네에 있는 빈 로이를 요즘 우리는 자주 간다. 원래는 시내의 칼슈타트 백화점 지하에 있는 고 아시아를 자주 갔었다. 그런데 코로나 여파로 칼슈타트가 휴업을 하는 바람에 고아시아도 문을 닫아 버려서, 급하게 새로 찾은 곳이 바로 이 빈 로이였다. 작지 않은 매장 가득 온갖 종류의 아시아 식재료가 차 있다. 훠궈용 베이스는 적어도 열 종류, 처음 보는 중국이나 태국의 인스턴트 누들도 산더미에, 야채칸에는 어떻게 해 먹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야채들로 가득하다. 냉동 코너는 더하다. 새우나 오징어는 기본이고, 고등어, 갈치, 문어와 조개, 그 외에 처음 보는 생선들이 꽁꽁 얼은 채로 포장되어 있다. 죽순, 닭발, 망고와 두리안… 코너마다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하다.
아시아인인 우리도 이런데, 독일인이라면 얼마나 낯설까. 독일의 다른 마트들에서 능숙하게 장을 보는 독일인들과 그 사이에서 헤매던 우리의 관계는 이 아시아마트에서는 어느새 역전된다. 아시아마트에서 장을 보는 독일인을 구경하는 것은 묘한 재미가 있다. 망설임 없이 진열대에서 제품을 골라 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제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패키지에 깨알만 한 크기로 덧붙여 인쇄된 독일어 정보를 살펴보지만, 언제나 그곳에는 충분한 정보가 없다. 특히나 우리가 한국 라면 코너나, 한국 장류 코너 같은데에서 해메이는 독일인을 만난다면, 우리에게 물어본다면 친절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데, 하는 의기양양한 마음이 자동적으로 생겨난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한 번도 혹시 한국 라면을 하나 추천해 줄 수 있어요? 하고 물어보는 독일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한국 라면 코너에서 서성이는 독일인은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목표가 확실했다. 대부분 불닭볶음면을 사러 온 사람들이다. 독일 사람들 매운 것 못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다 뻥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이렇듯 장보기 전성시대가 찾아온 것은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일의 장바구니 물가가 서유럽에서 싼 편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의 노동이 들어가는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은 언제나 독일이 한국보다 훨씬 비싸지만, 마트 물가만큼은 독일이 더 싸다. 한국에 살 때 이마트에서 장을 봐오던 것을 생각하면 체감상으로는 같은 부피의 장을 봤을 때 가격은 반 값 정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페니에서 쇼핑카트를 가득 채우면 보통 50유로가량, 에데카에서는 70~80유로 정도가 든다. 이마트에서는 한 번도 쇼핑카트를 가득 채워본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10만 원 안팎의 금액이 나왔던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장을 보고 매끼를 집에서 해 먹으면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집 밖에 한 발짝 나서기만 해도 맛있고 저렴한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널렸으니 말이다. 그전까지는 한 번이라도 더 장을 보고, 한 종류의 식료품이라도 더 먹어보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치즈든 햄이든 맥주든 와인이든 아직 먹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