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상실에 시대를 읽었다. 거의 10년만인 것 같다. 이제와서 읽어보니 으엥? 하는 구절들이 조금씩 있지만, 가볍고 술술 읽히며 종종 꽤 멋진 문장이나 묘사가 나왔다. 무엇보다 한때 정말 좋아하고 많이 읽었던 책을 이제 와서 다시 읽어보니, 알게 모르게 내가 이 책과 그 외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에 꽤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이 나이쯤 되서야 그런 것들이 조금씩 보인다. 나를 지금의 나로 조형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볍게 탐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포스트는 그 중 첫번째로 당연히 "상실의 시대"를 다룬다.
자폐 그런데 쿨함을 곁들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초기 소설들의 주인공들이 자폐적이라고들 이야기하던데,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 와타나베가 대표적인 경우 같다. 그에게는 원하지만 가지지 못하는 것이 있고,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런 문제 앞에서 와타나베는 꽤나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괴롭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 하거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좀 부족하다.
물론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아무것도 안하는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번 한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상 그 시도들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실패에 대한 와타나베의 태도와, 그의 입을 빌려서 서술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건조한 문장에서 묻어나오는 해탈한 듯한 초연함이 이 책의 매력이면서도 "자폐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인 것 같다. 이 책에는 일본 만화의 전형적인 남주가 갖고 있는 "열혈성"따위는 전혀 없고, 대신 밑바닥에 "올 일은 와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진득한 체념의 정서가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일종의 "쿨내"가 토핑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래의 문장을 보자:
"넌 아무래도 내말을 이해 못하는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만한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와타나베군은 유머감각이 이상해
쿨함과 함께 따라오는 것들이 한 세트 더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계와의 연결에 공을 들이는 대신 와타나베는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을, 그리고 다소 뜬금없는 유머를 갈고 닦는다. 이 취향, 라이프스타일, 유머는 그가 풍기는 "쿨내"와 함께, 와타나베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대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들로 보인다. 이 책에서 유명한 "봄날의 곰" 부분을 인용해보자:
"저기 있잖아, 뭔가 말 좀 해줘."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아주 사랑스러워, 미도리."
"아주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붙어버릴 만큼 사랑스러워."
"더 멋진 말을 해줘."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놀이 안 할래요?' 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어때, 멋지지?"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정말 "너무 좋아"할까? 책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호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실의 시대에서 진 히로인은 나오코이고, 와타나베는 거의 언제나 나오코만을 바라보고 있다. 미도리 역시 남자친구가 있는 입장이니 저 대화는 사실 불륜 커플들의 부부 역할극 같은 길티 플레져 폭발 장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적어도 미도리는 (남자친구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와타나베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미도리의 자신을 향한 마음에 답해야 하는 순간, 와타나베는 "봄날의 곰" 이야기를 하며 능숙하게 도피한다. 귀엽고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얼마만큼" 좋아하는 지에 대한 답변으로 따져보면 "아기곰과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며 온종일 놀 만큼 좋다"는 말에 의미있는 정보값은 거의 없는거나 다름없다. 유머를 통해 와타나베는 곤란한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유머 외에도 음식과 패션, 음악에 대한 와타나베의 세련된 취향도 일종의 도피처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한데, 나는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고등학교때 즐겨들었던 노래들과 그걸 들었을 때의 감정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학창시잘 즐겨듣던 노래들에 대해서도 글을 써볼 생각이다)
농담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농담하기
상실의 시대를 나는 중학교때쯤 처음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한 세 네번 정도 더 읽었던 것 같은데 나는 기억력이 영 꽝이기 때문에 (늘 그렇듯)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웠다. 그런데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읽으면서 꽤나 놀랐던 구절이 있었다.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농담을 농담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말해서, 이게 농담인지 농담이지 않은지 헷갈려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인데, 거의 동일한 말을 대학교에 들어왔을 때 내가 꽤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와타나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될 것은 되지만 되지 않는 것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세상 모든 일들이 어떻게 되든 ”베쯔니 이이케도“라고 말하는, 쿨함과 좋은 취향과 뜬금없는 유머 감각을 장착하고 흘러가는 듯 사는 사람이? 분명히 그랬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와타나베와 그 캐릭터를 만들고 대사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를 닮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농담을 할 때의 태도나 표정도 와타나베를 닮아있었던 것은 아닐지. 유머가 그만큼 재미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도 내 생각은 크게 변하지 읺았다. 그 밖에 다른 어떤 선택지가 있겠는가.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그렇다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래서 시티 빌더 게임을 하고, 완성되지 않는 게임을 만들고,글을 쓰고, 기타를 쓴다. (대부분의 가용 시간을 일하는데 쓰지만) 쿨한 태도는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짐작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내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 필수로 장착하고 있어야 하고, 유머는… 매우 중요하다.
이런 삶의 태도를 자폐적이라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가는데 노력이면 모든게 가능하다는 원피스 식의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은 더 건강하지 못하잖아. 결국 언제나 그렇듯이 답은 중간 어딘가에 있는 거긴 한데, 적절한 중간을 찾는 것이야 말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쿨해도 만만치 않은 세상
상실의 시대라니, 너무 직접적인 이름이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다. 상실의 시대는 문학사상사에서 붙인 새 이름) 이 책을 관통하며 흐르는 어떤 감흥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게서) 사라지고, 그 이치는 이해할 수 없으며, 어찌할 방법도 없다. 또는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체념과 쿨병이라는 두 몽둥이를 들고 맞서봤지만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 와타나베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그는 마지막에는 무너저 내릴 수 밖에 없다. 세상 쿨한 와타나베지만 그래도 나오코에 대해서만은 진심이었기에 갑작스러운 나오코의 죽음을 버틸 재간이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화기 너머의 미도리에게 어디냐는 질문을 들은 다음, 자기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며 무너져 내리는 와타나베의 모습은 처음 읽었을 때 부터 인상적인 엔딩이였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었더니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난 아직은 나오코를 정말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진 않아.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무엇이든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지. 하지만 만일 시간만 있다면 나는 나오코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나오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책의 앞부분에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기 전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어깨에 힘을 좀 빼면 모든 것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을 들은 나오코는 "그걸 누가 모르냐, 하지만 나는 어깨에 힘을 빼면 나는 사라져버리고 말 거다, 지금까지 평생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다른 방법으로 사는 법을 모른다"고 말하며 화낸다. 인용한 와타나베의 말은 그러니까, 나는 네가 (왜 그렇게 어깨에 힘을 넣고 사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여서 노력해서 이해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폐적인 내 세계 바깥을 향해 보겠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 책을 통틀어 와타나베의 의지가 제일 강하게 표현되는 문장일 것이다. 그런데 나오코가 시간을 주지 않고 죽어버렸으니, 와타나베는 무너질 수 밖에.
삶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요즘 내 삶이 즐겁고 좋다. 사실 괴로웠던 적은 별로 없다. 난 걱정도 잘 하지 않고, 미래 계획도 잘 세우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에는 잠깐 고민하지만 제일 최선인 것을, 제일 내키는 것을 고른다. 커다랗고 중요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일도 잘 없다. 물론 종종 위기는 찾아오고, 그럴 때는 힘드는 순간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무사히 넘어가게 되고, 무사히 넘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요즘엔 나이도 이만큼이나 먹어서 그런지, 예전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며 밤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뻥이다. 길어봤자 30분 정도 한다)
생각해보면, 나의 평온의 핵심은 (물론 그 외에도 서울에 집이 있다, 번듯하진 않아도 커피가 맛있는 작업실이 있다 등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굳이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마음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사회 생활을 오래 하면서 배운 이런 저런 기술들은 몸에 익은지 오래라서 허리춤에 매달아둔 공구 주머니에서 드라이버나 줄자를 꺼내듯 편하게 바꿔 장착할 수 있고, 이것도 꽤 도움이 된다. 그리고 유머-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 좋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절묘한 유머는, 물론 그 유머를 들어주고 웃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정말 효과가 좋다. 이해하지 못할 바에는 함께 웃는 편이 더 낫지 않은가?
이런 나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상실의 시대의 영향을 받은 걸지는 잘 모르겠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댄스 댄스 댄스 같은 하루키의 초기작들을 나는 전부 어렸을 때 읽었고,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 책들에게도 나는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전형적인 최중원식 의식의 흐름대로 글쓰기 했을 때의 문제다) 세 줄 요약을 해보자.
나에게 쿨병이 있나? 예전에 언젠가는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유머가 재미있나? 뿌듯하게도 종종 먹힌다.
아직도 자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나? 종종 그런 것 같긴 하지만...그래도 여러 사회적 역할을 오가면서 나름 능숙하게 할 일을 한다.
이 정도면 상실의 시대를 꽤 건전한 방향으로 극복한 것 같다는 총평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