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다섯 명은 모두 얼큰하게 취해있고, 분위기도 영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화끈한 파티로 유명하다고 해서 교통이 불편한 중산간지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까지 찾아왔는데 여자 손님은 두 명뿐이었으며, 그 두 명이 서로 모종의 눈빛을 주고받는 듯 싶더니 바비큐 불판 위에 올려진 첫 고기가 채 익기도 전에 나는 솔로다를 봐야 할 시간이라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나이인 다섯 남자는 모두 만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 빼곤 공통점이 많지 않다. 대화는 자주 끊기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가 자신의 잔에 소주를 직접 따라 마신다. 해운대나 광안리, 양양이나 을왕리였다면 바닷가에라도 나가서 같이 놀아줄 이성을 직접 구하러 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숙소 주변에는 모든 게 깜깜하고, 이름 모를 들짐승 소리도 들린다.
보다 못한 누구 한 명이 술 게임을 제안했다. 놀랍게도 이성 없이 하는 술게임도 재미있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의식적인 노력 없이, 순수하게 이기는 것에만 신경을 쓰며 그들은 369, 딸기, 베스킨 라벤스 같은 클래식한 술자리 게임을 여러 판씩 했다. 여자 손님 두 명이 물이나 맥주 등등을 가지러 나왔다가 들어갔지만 남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빈 맥주캔이며 소주병들이 많아지고, 얼굴은 점점 붉어졌고,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열 두시가 넘어서까지 공용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테스토스테론의 청각적 현현에 참다못한 여자 손님들이 나와서, 자야 하니까 조용히 좀 해달라고 했다.
여자 방의 문이 닫히자, 남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느라 끅끅거렸다. 재미있었겠지? 나와서 같이 게임하고 싶었지? 너희 없어도 우리 재밌게 놀 수 있다고! 남자들은 이제 게임을 그만해도 상관없었다. 할 만큼 해서 질렸고, 무엇보다 이젠 다들 조금 지쳐 있었다.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이런저런 화제가 돌고 돌았다. 한 명이 화장실에 간 사이 그 사람의 폰에 진동이 울렸는데, 금세 친해진 사람들은 이 시간에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이성이라면, 이건 분명히 뭔가가 있는 거다, 기만자인 것이 틀림없다 같은 말을 하며 그 사람의 폰에 뜬 알림을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당연히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비밀번호로 넘어갔다.
“제가 사실은 심리학을 전공했는데- 뭐 물론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비밀번호를 보면 그 사람 성격이 많이 드러난대요. 기억하기 쉬우면서 남들이 못 맞히게 만들려면, 완전히 자기만의 논리로 만들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이게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완전 미지의 영역이에요. 연구로 해보려고 해도… 누가 자기 비밀번호를 알려주겠어요.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잖아요? 서로가 뭐 하는 사람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름도, 심지어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모르잖아요? 내일 아침 헤어지면 끝이니까. 그래서 제 얘기부터 하나 해볼게요. 제 비밀번호에 얽힌 이야기인데… 솔직히 좀 창피하지만, 재밌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 저는 조용하고 존재감이 옅은 아이였던 것 같아요. 반에 일진까지는 아니지만 잘 놀고, 언제나 무리를 데리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죠. 하루는 그 친구가 수업 다 끝나고 막 집 가려는데 제게 와서, 무슨 게임 아이디를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자기는 무슨 치트를 하다 걸려서 다시 만들 수 없다면서. 그래서 같이 피시방에 가서, 처음 보는 RPG게임에 제 이름으로 가입했죠. 그런데 비밀번호를 제가 그때까지 쓰던 거로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 이름을 쓰고, 그다음엔 계정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던 친구 이름도 쓰고, 그다음엔 7979 숫자를 붙였죠. 네, 친구친구라는 뜻 맞습니다… 부끄럽네요.
그 친구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다른 게임들에 대신 가입해 달라고 했고, 저는 그때마다 같은 비번을 걸어서 아이디를 넘겨줬죠. 근데 그 친구가 갑자기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죽은 거예요. 난리가 났었죠. 아무튼 그다음에 제가 그 친구에게 만들어 주었던 아이디를 하나씩 다 들어가 봤는데, 그 많은 계정의 비밀번호를 하나도 바꾸지 않고 쓰고 있었더군요. 심지어 제가 아닌 그 친구의 이름으로 가입되어 있는 계정 중 몇 개도 똑같은 비밀번호로 설정되어 있었지 뭔가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조심성 없는 친구였죠.
네, 그 비밀번호는 이제 제 겁니다. 그 조합법을 알던 사람은 세상에서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죽어버렸잖아요. 이상하지만 왠지 모르게 저는 그게 좋더라고요. 두 명이었지만 한 명이 되었다는 게. “
“와, 형 이야기 듣고 보니까 제가 비밀번호를 정하게 된 이야기가 너무 한심하게 보여요. 저는 그냥 옛날부터 좋아했던 음식 이름이거든요. 원래 이름이 긴 음식이라서 다들 줄여서 세 글자로 부르는데, 세 글자는 비밀번호로 하기엔 너무 짧으니까 두 번 반복하고, 그 사이에 숫자와 특수기호 넣으래서 하나씩 골랐죠. 네? 무슨 음식이냐고요? 아무리 그래도 진짜 제 모든 계정 비밀번호가 다 그건데…하지만 숫자와 특수기호를 말하지 않으면 괜찮을까? 에라 모르겠다. 고치돈이요. 고구마 치즈 돈가스”
“그 정도면 귀엽네. 아마도 내 비밀번호가 제일 음침할걸? 어차피 다 취해서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까 한 번만 말해줄게. 민희현서희주선아예진. 내 전 여자친구들이야. 만났던 순서대로. 민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났던 애니까 20년도 넘었지. 예진은 저번 달에 헤어졌고. 이게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한 거였는데, 이제는 헤어지면 치러야 하는 의식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고 할까. 헤어진 날 당일에 집에 돌아가서는, 기억나는 모든 계정의 비밀번호 끝에 그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업데이트하거든. 네다섯 시간은 족히 걸리는 엄청난 일인데, 하고 있다 보면 솔직히 현타가 올 때도 있어. 그치만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그 다섯 명의 이름을 연달아 쳐 넣고 보면, 컬렉션을 완성한 것 같은 묘한 만족감이 든단 말이야. 후…그렇지만 이젠 그만 길어졌으면 좋겠어.”
“그거 만나는 사람한테 들키면 절대 안 되겠는데요? 그런데 사실 제 비밀번호도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거긴 해요. 제가 사실은 꽤 오타쿠거든요. 애니랑 만화를 좋아하는. 그렇게 보이지 않죠? 일코를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아무튼, 제가 학생일 때 정말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거의 모든 대사를 다 외울 정도였죠. 거기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이 있는데, 그러니까 두 명중에 한 명- 긴 머리 말고 짧은 머리. 그 친구의 생일이에요. 그러니까 1990년 10월 30일. 뭐 거기다가 다른 분들처럼 그때그때 알파벳 a나, 특수문자 중에서는! 를 붙이는 정도. 한 번은 제가 일 년가량 만났던 여자친구랑 술을 먹다가, 오늘처럼 비밀번호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그때 서로의 비밀번호를 공개했었는데 제가 19901030이라고 하니까, 바로 누구 생일이야? 하더라고요. 애니에 나오는 캐릭터 생일이라고 말했더니 한숨을 크게 쉬고는, 내가 2D에게 질투를 느끼는 날이 오다니-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근데 웃겼던 게, 그 친구의 비번이 제일 좋아했던 아이돌의 첫 싱글이 공개되었던 날이었던 거죠. 날자 뿐만이 아니라 시간까지 붙여서. “
“다들 의미를 담아서 비밀번호를 정하는군요. 신기합니다. 처음 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비밀번호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재밌네요. 제 비밀번호에 얽힌 이야기는 그렇게 재미있지 않아서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릴까 조금 걱정이 되지만, 제 순서니까 어쩔 도리가 없군요.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외국에서 자랐습니다. 미국에서요. 아버님이 한국 기업의 미국 지사에서 일하셨거든요. 뉴욕이나 시카고, LA 같은 대도시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님이 가구회사의 원자재를 수급하는 부서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중북부의 유명하지 않은 소도시에서 살아야 했죠. 가구용 목재가 그쪽에서 나거든요. 장을 보러 가려면 차를 타고 빽빽한 침엽수림을 따라 난 좁은 길을 따라 한 시간을 나가야 하고, 봄이 되면 모두가 우리에게 막 동면에서 깨어나 허기진 채로 배회하는 곰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그런 동네였죠.
제겐 누나가 한 명 있는데, 피가 섞이진 않았으니까 친누나는 아니지만, 거의 남매처럼 자랐죠. 미국에서 살 때 계속 같은 집에 살았거든요.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 이혼했고, 아빠는 어떻게 양육권을 가져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회사 일이 너무 바빴어요. 그래서 아빠는 저희 집에 같이 살면서 집안일을 돕고, 또 저를 돌봐줄 사람을 구했고, 누나는 그러니까 그 사람의 딸이었던 거죠.
미국 아이들이, 거칠고 짓궂어요. 저는 그냥 아시아인이고, 누나는 백인과 원주민의 피가 섞여있었죠. 한 학년 차이가 나니까 등하교를 같이 했는데, 그렇게 놀려대는 거예요. 뭐 휘파람을 불고, 지나갈 때 괜히 다리를 걸거나 어깨를 치고. 만만한 거죠. 그중에도 제일 주도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멍청한 백인 무리들이 한 세 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에 우두머리 격인 친구가 제일 악독했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친구가 누나를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한데. 분명히 그런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왜 좋아할수록 더욱 괴롭힌다고 하잖아요. 백인인 자신이 원주민 혼혈에게 끌린다는 사실이 싫었을 수도 있고, 또 그런데 그 원주민 혼혈과 같이 다니는 게 저 같은 아시아인이니까 더 싫었겠죠.
그 친구는, 실종 신고된 지 일주일 만에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강 하류의 모래톱에서, 퉁퉁 불은 채로요. 몇 년 만에 내린 폭우로 강이 범람할 뻔했고, 그 때문에 카운티의 모든 행정력이 혹시 있을지 모를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동원되는 바람에 좀 늦게 발견되었다는 것 같아요. 먼저 발견한 독수리들이 반쯤 파먹었다고 하더군요. 물에 빠져있었던 데다 훼손까지 심하게 되었던 바람에, 수사당국에서는 며칠에 죽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죠.
저와 누나를 향한 괴롭힘은 거짓말처럼 멈췄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다들 우리를 어려워하는 분위기였어요.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의 전설에서는 독수리가 악인을 벌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아무튼, 제 비밀번호는 그 친구가 죽은 날입니다. 제게 못되게 굴었던 사람이었다곤 하지만 죽은 날짜를 비밀번호로 쓴다니… 정상으로 들리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제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로 원하면, 죽을힘을 다해 원하면 믿기 어려웠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
마지막 남자의 이야기가 끝났다. 아무도 말을 어떻게 덧붙여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하하하… 미국은 역시 좀 무섭네요” 누군가가 겨우, 어색한 웃음과 함께 한 마디를 짜냈다. “전 그냥 한국에서 쭉 살아야 할까 봐요”
사람들은 조용히 남은 술잔을 비우고, 먹다 남은 채소며 쌈장이며 안주들을 버리고, 설거지를 하고 상을 닦은 다음 각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모두 침대에 누워서 그날 저녁 찍었던 사진 중 하나를 골라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린 다음, 각자가 신경 쓰고 있는 이성이 하트를 눌러주기를 기다리다가 어느 누구는 조금 기쁜 마음으로, 어느 누구는 아쉬워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다섯 명의 남자는 모두,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자기가 올린 적 없는 게시물이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날 밤 고기를 구워 먹고 술 게임을 하고, 비밀번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찍은 것 같은, 별 의미 없는 공간이나 사물의 사진들이었다. 사진 밑에는 각자의 인스타그램 계정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목소리가 커졌고, 서로가 서로에게 삿대질을 해 댔다. 하지만 모두가 부인하는 상황에서 범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출동한 경찰들도 어깨를 으쓱하며 난감해했다. 구글이나 애플, 인스타그램을 가진 메타가 수사에 협조를 해줘야 하는데, 이 정도의 작은 일에는 공문을 보내도 답장도 안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직 피해가 하나도 없으신 거잖아요. 저라면 빨리 비밀번호를 바꿀 거 같은데요, 선생님들.” 돌아가기 위해 순찰차에 타려던 경찰관 한 명이 말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각자는 휴대폰을 붙잡고 수십 개의 계정 비밀번호를 바꾸고 또 바꾸었다. 최대한 서로 멀리 떨어져 앉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