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도서관 | 월간 국회도서관 6월호 기획 기사
송재은 | 작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밖에서 잔뜩 묻히고 온 타인의 흔적을 탈탈 털어 비워내지 못하면 온전한 자신으로 지내는 시간이 부족해지고, 나와의 대화가 줄어들수록 타인에게서 나를 분리하기 어려워 마음을 쉽게 휘둘린다. 하지만 자신과 홀로 남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아는 지나치게 팽창한다. 끝없는 감정의 확장은 자신을 숨 막히게 만든다. 나를 오래 마주하면 수많은 진실과 고민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만의 방이 절실한 만큼 타인과 함께 하는 공간 또한 필요하다. 타인은 나로 가득한 풍선에 구멍을 내 압력을 낮추고 끝없는 상승을 멈추게 하는 존재다.
사람이 오고 가는 공간에는 표정이 있다. 그것은 드나드는 사람의 얼굴을 닮고, 그곳을 매만지는 사람의 분위기를 닮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안정을 얻고 타인에 대한 감각을 벼린다. 사람을 향해 열린 공간은 삶의 감각을 고취시킨다. 우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변함없는 공간이 아니라, 강과 바다처럼 흐르고 변화하는 공간에서 타인을 만난다. 종종 마주하는 얼굴과 처음 보는 얼굴에서 반가움과 설렘, 혹은 불편을 느낀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은 긴장을 주고, 긴장은 무뎌진 오감을 깨워 주변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타인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혼자일 때는 느끼지 못하는 외부의 자극을 인식하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정보와 상호작용하는 동안 삶은 탄력을 띤다. 누구에게나 나 자신이 아닌 것을 느끼는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집을 작업실처럼 사용하던 3개월이 지나고 집에서 40분 거리에 서점 겸 작업실로 사용할 공간을 얻었다. 온통 내가 고인 방에는 내 움직임이 일으키는 것 외에는 소리도 냄새도 새로운 생각도 없다. 마주할 대상이 없는 공간에서 나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표정을 갖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겨우 나만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며 나라는 것의 넓이는 점점 줄어들지만 그 깊이는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어두워진다. 자극 없는 삶은 매일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고, 나는 결국 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집을 나와 걷고, 버스를 타고, 또 한 차례 버스를 갈아탄다. 긴 이동 시간 내내 쏟아지는 자극은 내 세계를 움직인다. 내 감정 기복의 원인이 나 하나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되자, 삶은 막힌 공간이 아니라 바깥이 들어올 여지가 있는 것으로 바뀐다.
공간을 얻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아버지 뻘의 경비 아저씨들과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는 이웃이 됐고, 이 공간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생겼다. 글쓰기와 독서 모임을 열며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친구들의 사랑방이 되어 말로만 듣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우연히 대학 때 담당 교수님이 방문하기도 했다. 웃을 일이 많아졌고, 그만큼 민감한 사건과 나쁜 사고도 늘었다. 그 좋고 나쁨의 합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조금 더 알게 했고, 더욱더 모르게 했다. 모른다는 걸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걸 알게 되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모르는 만큼의 에너지가 더 필요했고, 내가 아는 것이 적기에 마음을 더 쓰며 처신하고 고민해야 했다. 마음은 쓸수록 닳는 것이 아니라 쓰는 만큼 언제나 더 꺼낼 수 있도록 자꾸 생겨났고, 어제의 웃음을 떠올리면 상처 속에서도 다시 마음을 열고 싶어졌다. 알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타인을 알게 되는 만큼 나를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겨우 나만큼을 알고 나만큼의 신비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삶에 타인을 들이면 우리는 두 사람만큼의 크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공간까지 마음의 마당으로 쓰게 된다.
우리는 지난 이 년 동안 공간의 부재를 겪었다. 이동과 만남에 제한이 생겼다. 가깝게는 다양한 성격의 카페부터 가족 단위가 휴식을 취하던 소공원, 이웃을 마주하던 주민 생활 문화 센터, 조금 더 나아가 크고 작은 행사를 열고 모임을 만드는 동네 서점과 활기를 가진 시장, 공간 기반의 커뮤니티에서의 교류가 사라졌다. 느슨한 유대의 공동체를 표방하던 나의 전 직장, 소셜 살롱 공간도 결국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사적 공간의 수요가 늘어나고 내 방 꾸미기가 유행하는 반면 코로나 블루가 찾아왔다.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관계 맺기와 사회생활의 어려움에 지친 이들이 혼자가 편하다고 선언했다. 때마침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낼 일이 사라진 것이다. 일상의 활력을 견인하던 공간들이 문을 닫았고, 많은 것이 비대면으로 바뀌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편리처럼 느껴졌고,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도했지만 어느덧 사람들은 갈 곳을 잃고 표류했다. 물리적 감금에서 이어진 정신적 감금으로 모두가 지쳐갔다. 혼자인 것은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코로나가 심해질 무렵 경기문화재단에서 글쓰기 모임을 기획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모임의 대부분을 비대면으로 진행하고 단 한 번을 만났다. 함께 글을 쓰고 모임에 찾아온 시민은 모두 대화와 만남에 목마른 이들이었다. 다른 사람의 삶이 궁금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작용을 나누고 싶어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동안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정말 혼자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그 시간이 즐겁지 않다.”라는 말을 오래 곱씹으며 살고 있다. 십 년 전 혼자가 좋다며 떠난 긴 배낭여행에서 나는 ‘진정 홀로여 본 적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독방에서 살 수 없다. 나는 타인의 다정함을 먹고, 살았다. 그 다정이 나를 혼자여도 괜찮은 인간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안전한 곳에서 나는 공기처럼 당연한 안전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상상의 발끝도 쫓지 못하는 현실과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만든 깊은 심연에서 나를 끌어올린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 삶에 의미도 재미도 없다고 느껴질 때 글을 열심히 썼다. 그럴 때에 내가 쓴 것은 불행이나 우울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믿는)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었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것들은 내가 고마움을 느꼈던 타인의 말과 행동,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었다.
내게 더는 좋은 것이 없다고 느낄 때 나는 ‘어떤’ 공간을 찾아다녔다. 그 공간은 꼭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곧 공간이 되기도 했다. 내가 원한 것은 새로운 친구가 아니라 삶의 어떤 순간을 내가 아닌 것과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며 ‘취향’이라는 글감을 두고 사람들과 함께 글을 썼을 때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취향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 뒤에 사람들이 취향이 다른 타인을 굳이 만나려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공동체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의 모임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은 어쩔 수 없는 것, 나와 내 주변이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고향을 잃듯, 우리가 살아갈 공간을 좁힌다. 물리적으로 우리가 갈 수 있는 공간과 닿을 수 있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없앤다. 최근 대선 결과를 통해 우리는 사회가 품은 격차들을 선명하게 읽었다. 우리가 서로 얼마나 먼 곳에 서있는지를 확인했다. 각자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마주할 일이 줄어든 것일 테다. 사람들이 섞여 지낼 기회가 줄면 각자의 의견을 강화하는 편 가르기가 남는다.
타인의 삶을 신경 쓰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는 공간의 회복이 그 사치를 가능하게 한다. 사람이 오고 가는 공간에는 다정이 깃든다. 공간의 의도와 동선, 모든 요소가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공간의 쓰임과 그 이름을 결정한다. 사람을 연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얼굴과 목소리, 몸짓에서 나 아닌 존재를 감각할 수 있다. 나를 꽁꽁 싸매고 나와 같은 것들에 둘러싸이는 것이 안전은 아니다. 그 태도는 나의 경계, 그 바깥을 나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삶을 강퍅하고 위태롭게 하기도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방. 나 아닌 것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하는 공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이 글은 책방 낫저스트북스에서 쓰기 시작했다. 책방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다정함이 이 공간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에서 워크샵을 하며 만나 오래된 인연들이 있고, 인연이 되고 싶은 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적도 있다. 책방 강아지 순돌이와 붙어 앉아 그 조그만 머리통을 쓰다듬고 있자면 인간사 번뇌가 사라졌고, 책방에서 쭈뼛거리다 보면 저녁 시간이 되어 모르는 얼굴과도 식사를 함께 했다. 그렇게 사장님을 통해 알게 된 사람, 동물 친구와 어울리고 새로운 책을 접하며 나 자신이 더 넓은 세계에 속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마 나는 어느 정도 본래의 나보다 더 열린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에겐 언제나 갈 곳이 필요했다. 여차하면 달려갈 그곳은 늘 내 방이 아닌 공간이었다. 어떤 자극을 주는, 어떤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나 아닌 것으로 다시 내가 될 수 있는 곳. 내가 ‘나’를 고집하지 않는 곳에 다정함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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