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낫프로
우울한 감정은 적립식인 것 같아요. 내 통장에 이자가 이렇게 불면 좋겠는데 안 좋은 일이나 감정이 더 빠른 속도로 불어나서 화 악하고 나를 덮쳐요. 금이 간 유리가 한계에 다다르면 와장창 깨지는 것처럼 마음도 깨져버리는 거죠. 저는 재작년 하반기가 너무, 정말, 완전, 엄청 우울했어요.
그때 뷰티용품 브랜드 리뉴얼 PM을 하고 있었어요. 처음 한 제안 피티가 선정되어서 프로젝트도 맡았죠. 다들 옆에서 잘 도와주셨지만 PM이란 이름의 무게를 부담스럽게 생각했어요. 최대한 도망치고 싶었어요. 이전에도 PM을 했지만 킥오프 미팅부터 모두 나만 온전히 쳐다보고 질문했던 적은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까 의심했어요. 기획서를 쓰면서도 불안했죠.
이전에는 식품, 공간 CI 같은 중성적인 브랜드를 주로 맡았어서 여성 타깃인 브랜드는 오랜만이라 잘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걱정과 불안한 생각들이 부담이 되고 마음까지 짓눌려서 머리까지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이었어요. 매일 관두고 싶었는데 도망칠 수도 없어서 꾸역꾸역 버텼죠.
외부 활동도 바빴어요. 모임에서 으쌰 으쌰 하는 역할을 맡아서 에너지를 써야 했죠.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사람들이랑 놀면서 다 풀어야지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쉬는 날 없이 매일매일 약속을 잡고 놀러 다녔어요. 그때는 바쁜 일정이 나를 채워주고 무언가 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에너지를 채우는 활동이라고 생각했죠. 마음의 에너지가 질질 새고 있는걸 못 느꼈어요.
어느 날 왁자지껄 으하하하 저녁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그때 갑자기 너무, 정말, 완전, 엄청, 우울한 거예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엉엉 울고 있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받고 있던 일 스트레스, 웃는 걸로 감췄던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뻥 터져서 머리가 정지된 느낌이었어요. 그때 에어 팟에서는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싶어 만들었다는 가수의 신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저는 그 노래가 증폭제가 되어서 우울함이 빵 터졌어요
사람을 만나는 약속도 거의 줄이고, 일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하면서 아는 사람들에게 나 우울하다 많이 이야기했어요. 친구, 지인 닥치는 대로 만나서 내가 힘드니까 좀 들어줘요 무드로 조난 신호를 보냈어요. 근사한 위로들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그 조난 신호로는 회복이 잘 안 되더라고요. 집은 점점 배달음식 일회용품으로 쌓이고, 내키지 않을 때는 저녁을 건너뛰기 일수. 나를 안 돌보는 만큼 집도 점점 어지러워졌어요. 집에 오면 불도 켜지 않고, 침대로 바로 들어가 잠만 잤죠. 그 행동은 충전이 아니라 나를 무시하는 거였어요. 빨간불이 켜진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죠.
병원에 가야 하나, 어디를 가야 하나, 어디에 가면 괜찮아질 수 있는 거지? 일에 집중하다 문득문득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뿐이었어요. 그때는 몰라요, 나 힘들어요 다 때려치울래 하는 배짱도 없었고, 다 놓아버리기에 이때까지 끌고 온 프로젝트가 아까웠거든요. 조난 신호에서 나를 건져줄 수 있는 등대가 필요했어요. 필사적으로 이 우울한 마음을 떨치고 싶었어요. 병원은 아직 무섭고 상담센터를 알아봤어요.
대부분 만났을 때 하하호호 웃는 시간을 디폴트로 하지만 우리 모두 우울감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실제로 우울감에 대해 이야기하니 지인들이 나도 이런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다, 병원에 간 적이 있다 하는 경험을 많이 이야기해주셨어요. 공통적으로 많이 들었던 조언은 아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 되겠을 때는 상담을 받는 게 좋겠다는 말이었어요. 일과 관계에서 마음이 깨지는 일은 어렵지 않게 일어나요. 바깥에서 보면 나 빼고 다들 씩씩하게 웃으며 사는 것 같은데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내 옆에 친구도, 지인도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회사에 오전 반차를 내고 상담을 받았어요. 심리상담사의 상담은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어요. 내가 왜 힘든지,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이야기했어요. 일부터 시작해 가족, 친구 등 나를 둘러싸고 레이어를 하나씩 뜯어내고 내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 있는 게 이상했는데 모르는 사람이라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아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이야기할 때도 있었거든요.
그동안 저는 일이 잘 되기 위해, 모임을 잘 이끌기 위해, 친구와 즐겁게 지내기 위해 내 마음을 내버려 뒀어요. 네네 하면 바보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관계에서는 실천하지 못했던 거죠.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았던 거예요. 상담 선생님은 나를 주어로 많이 말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했어요. 나는 지금 화났어,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거야, 나는 이럴 때 불편해 처럼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이요. 부정적인 감정 표현이 아니더라도 나를 많이 드러내는 언어습관을 가지라고 조언해주셨어요.
어지러운 집도 내버려 두면 안 돼요.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부정적인 감정으로 빠질 틈을 안 주는 거예요. 설거지도 좀 하고, 청소기도 돌리면서 기분을 환기하는 거예요. 기분이 안 좋으면 이럴 틈을 갖기도 쉽지 않으니 부정적인 감정에 쓸려버리기 전에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는 거예요. 어떤 분이 듣기에는 시시한 해결책일 수 있지만 저에게는 꽤 큰 울림이었어요. 그동안의 언어 습관은 나를 잘 표현하지 않았구나, 힘들다고 다 놓아버리면 나까지 놓아버리게 되는구나 하는 띵! 한 느낌이 들었어요.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 그 방법은 상담으로, 어느 순간에도 나를 놓지 말기.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나의 상태를 정확히 이야기하기. 상담 한 번으로 우울한 마음에 해가 바로 쨍 뜨기는 힘들지만 저는 도움을 받았어요. 우울할 때 쓸 수 있는 치트키가 생겼으니 나는 이전보다 잘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겼고요. 내 주변에 생각보다 상담받는 사람들이 많아요.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더 심해지기 전에, 우울의 쓰나미에 쓸려가기 전에 마음의 제방을 잘 새워주세요. 나는 내가 잘 돌봐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