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한 커플로, 말레이시아에서 거주 중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현재 내 커리어는 도합 7.5년 정도 되는데, 계산을 해보니 말레이시아에서 어느덧 4년 반을 일해서 말레이시아에서 일한 기간이 한국에서 일한 기간보다 길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고 자란 곳이 한국이고, 첫 커리어도 한국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내 기준은 한국 문화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종종 '아니, 이렇게 다를 수가?', 또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종류의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직장생활을 하며 느꼈던, 한국인으로서 흥미로웠던 몇 가지 문화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다만 나는 이미 한국을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한국의 모든 회사와 말레이시아의 모든 회사를 경험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관적인 의견이 꽤나 많을 수 있음을 이해 부탁드린다.
What's your 1st language?
단 하나의 언어만 사용하는 한국 사람인 보람이와 내가 처음에 말레이시아에 왔을 때 굉장히 헷갈렸던 부분은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모국어가 무엇인지 도무지 파악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제1 언어가 바하사 말레이어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고, 태어난 가족과 자라온 환경에 따라 본인의 모국어가 달라진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물론 1st language의 비율은 인구 비율상 말레이어가 높겠지만, 중국어(이 또한 만다린과 광둥어로 나눠질 때도 있다)나 타밀어인 경우도 많고, 심지어 '영어'라고 대답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많아서 적잖이 놀랐다. 아니, 교포 2~3세도 아니고 말레이시아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떻게 영어가 1st language일 수 있지...?
몇몇 친구들과 직원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면서 영어가 공용어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보니 아래와 같이 대답해 주었다.
1) (당연하겠지만) 가족 구성원이 어떤 언어를 주로 쓰는지가 관건이다. 같은 국적이어도 타 인종과 거의 통혼을 하지 않는 말레이시아 특성상 가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2)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도 중요하다. Secondary school(한국의 중~고등학교)를 어느 인종 계열의 학교에 가는지에 따라서 배우는 언어도 달라지는데, 이때 영어로만 수업하는 코스가 있는 경우가 많다. 여유가 있는 집안일 경우 자녀들을 국제학교를 보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수업은 100% 영어로 진행되고 말레이어나 중국어는 교양과목 개념으로 배우게 된다.
3) 대학교에 다니게 되면 대부분의 과목을 영어로 배우게 된다. 따라서 대학을 나왔다면 기본적으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3-1) Twining 프로그램 (외국 대학과 연계하여 학위를 취득하는 시스템)까지 진행하는 경우 외국에서 공부하는 경험까지 갖게 됨
사실 말레이시아 사회에서도 '모국어가 엄연히 말레이어로 지정되어 있는데 영어 사용률이 높아지고 있어 문화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외국어라고는 영어밖에 못하는 한국인으로서 이런 현상은 힘든 외국 생활에서 한 줄기 희망과도 같았다. 최소한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와 수도권인 페탈링자야(쿠알라룸푸르에 맞닿아있는 도시로, 한국으로 치면 서울과 생활권을 공유하는 경기도의 도시인 성남/안양/고양시 정도의 느낌)에서는 영어만 사용해도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지장이 없고, 반대로 말레이어를 못해서 크게 불편했던 적은 아직까지 거의 없었다. 특히 직장에서는 영어가 공용어(말레이시아에서 경험한 3개의 직장 + 그동안 진행했던 모든 스크리닝과 면접은 영어로 진행되었다)이기 때문에 그나마 외국인으로서 비빌 언덕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한국인 없으면 메일이랑 보고서도 중국어로 써요?
현재 회사는 나와 2명의 Expat을 포함한 3명의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약 100여 명의 모든 직원이 말레이-차이니즈인(!)이다. 그래서 이 3명의 한국인이 대화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직원들끼리는 중국어로 대화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여담이지만 처음에는 약간의 소외감도 느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사무실의 배경음(?)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의 1st language는 중국어이다. 예를 들어, 내가 참여하고 있는 미팅이어서 영어로 진행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무언가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가 있으면 나의 양해를 구하고 중국어로 논의를 이어나가는데, 이후에는 당사자들이 상황을 훨씬 명확하게 이해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반대로 내가 중간에 미팅에 참여하는 경우에는 중국어로 진행되고 있던 회의를 영어로 바꿔서 진행하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고마우면서도 민망하게 여겨져서 회의에 있는 동안에는 최대한 집중을 해서 들으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중하지 않으면 도통 들리지 않는다...
입사 초반에 이런 일을 몇 번 경험한 후에 나는 '사무실에 고작 3명 있는 외국인을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동료 S(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한국 회사에서 근무한, 내가 실제로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한국어를 잘하고 잘 쓰고 잘 읽는 외국인)에게 물어보었다.
"S님, 만약에 저와 A님(한국인 매니저) 이 같이 일하지 않으면 모두들 중국어로 대화하겠죠?"
"음... 네. 아마 그럴 것 같아요."
"그러면 이메일이나 보고서도 다 중국어로 쓰게 될까요? 한국에 보고하는 내용이 없다고 가정하면요."
그녀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중국어는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많아서 안될 것 같아요.
그렇다. 생각해 보니 우리 팀에도 중국어는 할 줄 알지만 읽고 쓰는 것은 못한다는 직원이 한 명 있다. 애초에 말레이어는 그들의 선택지에 없고, 중국어로 회의는 할 수 있어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문서화에 제약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회사의 직원들의 국적은 모두 '말레이시아'이다. 실질적으로 문맹이 거의 없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늘 새롭고 놀랍다.
내 형편없는 영어를 견뎌줘서 고마워!
외국에 산 기간을 다 합치면 어연 8년 정도가 흘렀지만 여전히 영어로 무언가를 얘기해야 하는 상황이 늘 긴장된다. 유년기에 외국어를 배우지 않는 이상 외국어 습득 능력에 분명 한계가 있다는 점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원하는 바를 깔끔하게 전달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종종 답답하기도 하다. 특히 지금보다 영어를 더 못할 때였던 호주와 캐나다에 살았던 시절에는 언어로 인한 트러블이 자주 있었고, 이런 경험들로 인해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가끔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다행히 말레이시아는 내 경험상 서구권 국가보다 언어에 대해 더 관대한 면이 있어서 그나마 나의 부족한 영어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는 언어의 수준에 대한 잣대가 상대적으로 덜 엄격한 느낌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회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사용한 것은 아직 채 2년이 안돼서 여전히 뚝딱거리며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만, 이해심이 넓은 동료들 덕에 아직까지 별 탈 없이 무사히(?)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입장에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얼마 전, 팀원들과 회식 겸 저녁을 먹는데 팀장으로서 할 말 없냐고 해서 몇 가지 이야기 후에(맹세컨데, 정말 짧게 했다!) 진심을 담아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And, thank you for bearing with my shitty English.
모두들 웃고 몇 명은 그렇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약간이나마 팀원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여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도 여러 좋은 사람들 덕분에 말레이시아에서 영어만 갖고도 잘 살아남고 있다. 하지만 이번 달부터는 중국어도 공부해 볼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