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위빠사나(Vipassanā)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한 커플로, 말레이시아에서 거주 중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A님, 저 10일 정도 휴가를 써도 될까요? 그런데 그 기간 동안 메시지나 전화, 이메일을 전혀 사용하지 못합니다."
"써라. 그런데 무슨 일인데?"
"저 명상 코스에 다녀오려고요."
올해 3월 말, 보람이를 보러 태국에 다녀온 후 나는 왜인지 모르게 이전과 다른 우울감과 불안함이 생겼다. 비록 우리가 잠시 떨어져 있지만, 당분간은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보자고 늘 서로 다짐했지만 실제 내 마음은 그렇게까지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외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했는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 타국에서조차 떨어져서 지내고 있지?' 같은 생각부터 '당장 우리 팀 직원들이 그만둔다고 하면 어떡하지?' 같은 전혀 징조도 낌새도 없는 일을 걱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작년 말 팀장이 된 이후부터 회사 생각에 대해 더 몰입하게 되었고, 그와 맞물려 보람이가 방콕으로 떠나서 떨어져 지내기 시작한 이후 '(좋은 쪽으로던 나쁜 쪽으로던) 인생 참 알 수 없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이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부정적인 기분에 잠식당하고 싶지 않은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다음 휴가 때는 1주일 정도 휴가를 내어서, 보람이랑 어디 조용한 곳으로 여행이라도 가야겠다. 이번에 가게 되면 노트북 절대 안 열어보고 핸드폰도 정말 최소한으로 볼 거야.'
그런데 뒤이어 떠오르는 생각.
'잠깐... 그런 목적이라면 내가 아주 기가 막힌 곳을 알고 있잖아...?'
명상의 ㅁ자도 모르는 나지만, 우연찮게 두세 번 정도 위빠사나(Vipassanā) 명상 센터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기를 읽거나 들을 기회가 있었다. 열흘 간의 명상, 침묵, 전자기기는 물론 읽고 쓰는 것조차 금지, 채식 등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돕는다는 위빠사나. 곱씹어볼수록 지금 내 상황에 아주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디지털 디톡스도 하고 싶고, 마음의 불안함도 가라앉히고 싶고, 무엇보다 늘 차분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렇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노트북을 열고 웹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말레이시아에도 센터가 2개 있었고, 심지어 한 센터는 말레이시아 공휴일이 하루 껴 있어서 휴가로 인한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간에 진행되는 코스가 열려 있었고 남성 참가자(여성 참가자는 이미 만석이었다) 도 받고 있었다. 완전 럭키비키잖아?
일단 그날 신청을 바로 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확정 메일을 받게 되었다. '코스가 시작되기 1주일 전 다시 한번 마지막 참가 여부를 확인하는 메일에 답장을 해야 최종 확정된다'는 안내가 있어서, 혹시라도 중간에 마음이 바뀌면 취소를 하려고 했으나 최종 메일을 받는 그날까지 내 마음은 여전히 위빠사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 가자. 열반으로!
Day 0 - 입소일
센터에서 조직해 준 미니밴을 타고(소정의 금액을 지불했다) KL에서부터 약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센터는 콴탄(Kuantan) 시 외각에 위치한 야자수 농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 부지(대략 작은 단과대학만 했다)에 놀랐고, 굉장히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약간 압도당한 채 신청서를 작성하고 등록을 마쳤다. 그다음 명상에 필요하지 않은 소지품(e.g., 전자기기, 귀중품)을 반납 후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혹시 호스텔이나 예전의 군대처럼 모든 사람이 한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독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루 일정은 아래와 같다.
4:00 am 기상
4:30-6:30 am 홀이나 숙소에서 명상
6:30-8:00 am 아침식사
8:00-9:00 am 홀에서 단체명상
9:00-11:00 am 지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홀이나 숙소에서 명상
11:00-12:00 noon 점심식사
12 noon-1:00 pm 휴식과 지도 선생님과의 면담
1:00-2:30 pm 홀이나 숙소에서 명상
2:30-3:30 pm 홀에서 단체명상
3:30-5:00 pm 지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홀이나 숙소에서 명상
5:00-6:00 pm 차 마시는 시간
6:00-7:00 pm 홀에서 단체명상
7:00-8:15 pm 홀에서 선생님 법문
8:15-9:00 pm 홀에서 단체명상
9:00-9:30 pm 홀에서 질문시간
9:30 pm 각자 숙소로 돌아가기 - 취침 소등
그러니까, 참가자가 원한다면, 하루에 10시간은 명상을 할 수 있는 일정이다. 속세의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가한 명상 캠프이니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일정은 없을 것이다. 입소일 저녁부터 가볍게(!) 한 타임 명상을 하게 되는데, 이미 나는 입소 첫 날부터 열흘 후 깨달음을 얻은 고요하고 차분해진 미래의 나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클 타이슨이 그랬던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영상으로 보는 후기! (*스포주의)
https://www.youtube.com/watch?v=1eB_JbgmT1Q&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