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치즈가 만들어지는 곳
한 마을의 음식은 자연환경, 역사, 문화, 기술, 사람의 영향에 의해 정해지며 같은 식재료라 해도 전혀 다른 맛을 낸다. 그것을 두고 와인소믈리에는 떼루아라고 표현한다.
언제부터 왜 그것을 먹게 됐을까?
호기심을 갖고 식재료 탐험을 하면 여행의 재미는 배가 된다.
산, 들, 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구 3만 명의 소도시 임실은 현대 도시인들에게 청정 낙원을 선사해줄 자연이 잘 보존된 곳이다. 임실(任實)이란 지명은 통일신라 때부터 불리었는데 당시 한자 취음으로 "임"은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 "실"은 실(谷:마을)로 '서울'처럼 순 우리말이라 한다. 지금은 열매가 가득한 고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실 하면 치즈가 떠오른다. 무슨 연유로 치즈가 한 지역의 대표 상품이 되었을까? 치즈의 맛을 음미하며 생산지를 탐방하듯 임실 치즈너리를 떠나보자.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치즈가 만들어지는 곳 '임실’
서양의 음식으로만 알려졌던 치즈가 동양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돼 한 나라의 대표 브랜드가 되기까지... 임실 치즈의 이야기는 1964년부터 시작된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조건으로 유독 가난했던 한국전쟁 직후의 임실 마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소명을 품고 1964년 임실 성당에 부임한 지정환 신부(디디에 세스테반스, 1931-2019)는 온통 산과 들에 풀밖에 없어 할 일이 없다고 한탄하는 가난한 청년들과 마주하게 됐다. 그리고 임실 성당으로 부임 당시 동료 선교사로부터 선물 받은 산양 두 마리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풀밖에 없다는 것은 풀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 지역에 있는 것을 이용하자!"
임실은 노령산맥 동쪽에 비스듬히 위치한 내륙 산간지역으로 풀이 잘 자라는 낙농업과 고랭지 농업의 최적지인 곳이지만 50여 년 전만 해도 전쟁으로 황폐화된 숲, 논농사가 어려운 지형, 기술 부족으로 인해 가난과 식량난이 대물림 되는 산촌 마을이었다.
지정환 신부는 마을 청년들에게 산양을 길러보자고 제안했다. 우유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60년대 후반, 임실에서 전주까지 자전거에 산양유를 담은 밀크통을 싣고 다니며 외국인이 거주하는 곳과 병원에 팔았다. 산양유를 팔아 현금을 만드니 하나 둘 마을 사람들이 산양 분양을 요청했고 산양협동조합(현, 임실치즈농협)이 결성됐다. 산양유의 공급이 늘자 이번에는 보관과 저장에 문제가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신부님은 고향 벨기에로 돌아 가 3년간 치즈 가공 교육을 배워 1967년 한국 최초의 치즈 까망베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80년대 젖소의 보급이 시작되면서 한국 낙농업이 본격화된 걸 감안할 때 산촌마을 임실은 한국 낙농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발상지인 곳이다.
임실에 오면 가장 먼저 터미널 앞에 위치한 임실치즈 카페에 들려 임실 유가공 목장에서 직접 만든 신선한 요거트부터 맛보자. 그리고 여행의 든든 간식용으로 스트링치즈와 치즈 과자도 챙기면 임실 치즈 여행 준비는 완성. 임실 읍내에서 지정환 신부와 임실 청년들의 치즈 이야기가 보존되고 있는 최초의 치즈 공장까지 걸어가는 길을 추천한다.
읍내를 거닐다 보면 아담한 단층 건물 사이사이로 보이는 논밭뷰가 정겹다. 과거의 흔적이 많은 읍내에 유독 임실치즈 피자집과 임실치즈 대리점이 편의점보다 더 눈에 띄는 걸 보니 진짜 치즈의 고장에 온 것이 실감 난다. 읍내에는 지정환 신부가 처음 부임했던 임실 성당(1959년 설립)이 있다. 유럽의 시골마을에 있는 오래된 성당의 느낌과 닮았다.
최초의 치즈 공장이 있는 성가리 벽화마을
1967년 지정환 신부와 임실산양협동조합 조합원들이 직접 지은 치즈 공장으로 치즈를 안정적으로 가공하고 보관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직접 집 뒤편의 돌산을 뚫어 21.8M 길이의 동굴 저장고를 만들고 최초의 태양광 시설도 갖춰 놓았다. 그리고 임실치즈가 점점 유명해지자 지신부는 아무런 조건 없이 협동조합에 치즈공장을 넘겨줬다고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 와서 봉사와 헌신으로 베풀었던 선교사의 인류애에 고마운 마음을 기도로 남겼다.
임실군이 깐깐하게 보증하는 공동 브랜드 ‘임실N치즈’ 13곳의 목장형 공방에서 각기 다른 맛과 개성으로 전통 이어가
54년 한국 치즈 역사의 문을 지정환 신부가 열었다면, 그 쫀득한 힘을 지킨 건 바로 임실 주민들이었다. 지정환 신부의 산양 2마리로 출발한 임실치즈는 현재 13곳의 목장형 공방에서 직접 젖소와 산양을 키우고 다양한 치즈와 요거트 제품들을 생산하며 역사를 잇고 있다. 임실 치즈마을에서는 매일 새벽 5시, 아버지와 아들은 목장에 나가 착유를 하고 어머니는 신선한 요거트와 치즈를 만들 준비로 분주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임실 목장형 유가공 치즈공방
잘 발효된 숙성치즈는 우유의 고소한맛이 응축된 흰색의 아미노산 결정체가 소금처럼 콕콕 박혀있으며 유산균에 발효되면서 생긴 기포인 치즈눈(cheese eye)도 뽕뽕 뚤려있다. 임실치즈는 짜지 않아 한국인의 입맛에 최적화된 치즈라고 할 수 있다.
두 마리 목장, 신요섭 목장주
“다섯 살 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임실에 왔어요. 지정환 신부님과 동네 분들이 한창 치즈를 만드실 때였죠. 종교는 달랐지만 연배가 비슷한 두 분은 뜻이 잘 통하셨다고 해요. 아버지는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신부님과 함께 가난한 주민들의 삶을 일으키고자 애쓰셨죠. 산양 두 마리로 시작한 지정환 신부님의 뜻을 따라 ‘두 마리 목장’으로 지었어요. 지방과 단백질 함량이 높고 고소한 맛을 내는 산양유를 우유에 첨가하는 치즈와 요거트는 유일하게 우리 목장에서만 생산해요. 원재료 외에 다른 첨가물은 전혀 들어가지 않아 건강하고 담백한, 그러면서도 깊은 풍미가 살아 있는 제품이에요. 그 결과 2015년 ‘임실 자연치즈 콘테스트’에서 신선치즈와 숙성치즈 부문에서 저희 부부가 사이좋게 각각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죠.”
목장의 아침, 목장주 노관홍
“지정환 신부님이 치즈를 만들던 초창기 시절, 성가리 치즈 공장에 우유를 납품하며 낙농업과 인연을 맺었어요.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수면에 있던 저희 농장은 성가리 치즈공장에 납품하던 업체 중 가장 멀리 있었어요. 도로가 발달되지 않아 자전거로 족히 2시간은 걸렸지요. 그런데도 자전거에 우유를 가득 싣고 10년 동안 매일 아침 그 먼 길을 오갔어요. 한겨울의 눈보라도, 한여름의 거센 빗줄기도 제 열정을 막진 못했지요. 비결은 타고난 체력과 부지런함인 것 같습니다. 이 손 한번 보세요. 하루 세 차례씩 우유를 짜는 낙농인들의 손은 관절이 성한 곳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농장 일을 직접 건사할 만큼 끄떡없답니다.
소에 관해서만큼은 저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소가 걷는 모습, 우유 색깔만 봐도 소의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어요. 말할 필요도 없이 건강한 젖소에서 맛있고 좋은 우유가 나옵니다.”
산들 목장, 김정채 목장주
“소는 주인의 심성과 재정 형편에 따라 달라져요. 자식처럼 애지중지 대하고 투자를 하면 그만큼 건강하게 자라지요. 첫째는 좋은 풀을 먹여야 해요. 저는 소에게 필요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10여 가지의 풀을 엄선해서 먹이고 있어요. 소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늘 청결을 유지하는 것도 비용이 많이 들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죠. 낙농은 내 업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임실 농부 목장, 이산하. 이준학 2대 목장주
“목장은 누나와 저의 일상이었습니다. 유년 시절 저희 농장에서는 주말마다 목장 체험을 했어요. 아버지는 전체적인 체험 진행과 목장 관리를 맡았고, 저희는 초지 썰매 타기와 송아지 우유 주기 체험 같은 일을 도왔어요.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그 시간 그 일이 자연스러웠고 즐거웠던 것 같아요. 이런 일들을 하며 동물들과 교감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듬뿍 키웠고, 농장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사회성을 기르기도 했지요. 한마디로 목장은 저희에게 선생님 같은 존재였어요.”
매일매일 기울인 정성과 노력의 10개월 그 결실이 개봉되던 날. 애지중지 보살피며 관리한 고다 치즈를 잘라 건네준다. 그윽한 치즈향에 반하고 풍미 짙은 고다 치즈의 깊은 맛에 놀랐다.
치즈 마니아를 위한 임실엔치즈테마파크와 임실치즈마을
동화 속 치즈세상이라는 컨셉으로 임실의 치즈 문화와 역사를 즐길 수 있도록 축구장 19개 규모의 초지 위에 조성된 치즈테마파크다. 치즈 체험, 낙농 체험, 박물관과 치즈 레스토랑, 카페, 팬션이 한자리 모여 있다. 계절별로 이뤄지는 축제도 볼만하다. 테마파크의 치즈 동상 넘어로 보이는 마을이 임실치즈마을이다. 임실군이 인증한 임실엔치즈 유가공제품을 만드는 목장형 치즈 공방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다. 공방에서 직접 운영하는 카페와 치즈구이를 맛볼 수 있는 식당, 치즈 판매장이 있다.
호반의 청정 낙원 국사봉과 옥정호
임실은 뭐니 뭐니 해도 경관 맛집이자 일출 명소.
사진작가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국사봉 운해 촬영이다.
동트기 전 국사봉에 올라 새벽 해무가 넘실거리는 일출을 보면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넋을 놓고 보게 된다. 국사봉은 주차장에서 사진 촬영 포인트까지 약 30분이면 등반할 수 있는 코스로 남녀노소 모두 오를 수 있다.
국사봉의 일출을 실컷 감상하고 내려오면 옥정호의 안개도 서서히 걷히면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옥정호는 섬진강 다목적 댐을 만들면서 생긴 거대한 인공 호수로 저수면적이 26.3㎢로 총저수량은 4억 3천 톤에 달하며 호수 가운데 떠 있는 섬은 마치 붕어를 닮았다 하여 붕어섬이라 불린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그 사이로 보이는 붕어섬은 신선이 노니는 천상계처럼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다.
옥정호의 물안개길은 국토해양부 선정한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곳이니 꼭 걸어보고 가자. 최근 숲과 호수를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완성되어 경관을 감상하며 트래킹 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섬진강의 시작
섬진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에서 낭만의 캠핑을 할 수 있는 강변사리 마을
섬진강 상류인 물우리, 일중리, 장암리, 천담리에 있는 마을에서 산촌과 강촌의 낭만을 체험할 수 있다. 자전거 국토종주 섬진강 자전거길의 시작인 곳으로 섬진강변으로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캠핑장도 잘 갖춰져 있어 사회적 거리두기 여행지를 찾는 가족에게 제격이다.
특히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구담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역으로 고즈넉한 산세와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내려보는 소박한 산촌마을이다. 6월의 구담마을은 신록의 옷으로 갈아입은 산세의 풍경에 몸과 마음을 싱그럽게 만든다. 알프스 산맥의 어느 마을만큼이나 아름답다. 한국스런 자연경관에 흠뻑 취하자.
여행 팁
전주에서 차로 20분이면 도착하는 인구 3만 명의 소도시로 숲과 녹지, 물이 풍부한 목가적 풍경을 가진 곳. 임실은 4계절이 모두 매력적인데 신록의 계절이면 연두 빛 잎사귀들이 하늘거리며 청량함을 선사한다. 3월 말 벚꽃이 절정을 이루면 옥정호의 수변 길은 낭만의 꽃길이 되고 5월 작약꽃이 만발하면 울긋불긋 아름다움에 취한다. 한여름 무더위가 찾아오면 시원한 섬진강 상류 냇가에 발을 담그고 땀을 식히며 반딧불이와 함께 낭만을 즐긴다. 가을이면 목가적 풍경은 더욱 짙어지는데 이때는 마주치는 풍경마다 시상이 떠오를 수 있으니 디지털 노마드처럼 노트북만 가지고 임실에 머물러 보자.
특히 흰눈이 펑펑 내리는 날엔 겨울의 왕국 주인공이 된 듯 황홀한 설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옥정호의 일몰과 일출은 매일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자연이 만든 변화무쌍한 매력을 발산한다.
임실군 직영 유제품 판매처
글 I 안은금주
한국 농촌 자원과 식문화를 발굴하고 가치를 높이는 로컬 콘텐츠 기획자로 CJ푸드빌 계절밥상, 도심 속 로컬 레스토랑 '하베스트 남산', 평창 로컬푸드마켓 ‘바우파머스몰’, 농촌형 코워킹 스페이스 ‘안동 스페이스 마’, 군산 '미식의 도시' 음식관광 설계, '임실엔치즈 하우스'를 기획했다. @eungeumju.an
사진 I 빅팜컴퍼니 @bigfarm_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