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 본문에 영화 및 소설 <네버렛미고>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집어들게 된 첫번째 이유는,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필자가 좋아하는 장르인 SF라는 이유에서였다. 첫번째 이유로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면? 난 적극 추천한다. 그렇다면 두번째 이유로 이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추천하지 않거나 아니면 더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사실 SF 영화는 많이 봐왔지만 SF 소설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같은 장르의 다른 소설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혹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과 흥미진진한 속도감을 기대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이 작품은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 - 395쪽' 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 책은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책의 대부분을 주인공들의 유년 시절을 그려내는 것에 할애하고 있다. 사실 그 유년 시절이 바로 주인공들의 인생 전부를 말해주고 있다. 루시 선생님의 알려주고자 했던 것처럼 그들은 자라서 성인이 되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예정된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작가의 그 미묘한 뉘앙스를 따라가다 보면, 섬세한 문장으로 인간의 내면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그려낸 그 통찰력에 연신 감탄하게 되지만, 조금의 인내심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배부른' 생각은 영화를 보고 나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영화도 물론 잘 만든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소설에서의 그 세밀한 터치를 모두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캐시와 토미가 장기 이식의 집행 연기를 위해 '마담'을 찾아갔을 때, 갤러리에 헤일셤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했을 때가 그러하다. 소설에서는 캐시가 "어째서 그런 걸 증명하셔야 했던 거죠, 에밀리 선생님?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 - 357쪽 라고 반문하지만, 영화에서의 캐시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하는 듯한 표정을 보여줄 뿐이다.
아, 이 점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암을 비롯한 각종 불치병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면서 평균 수명이 늘어난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식받은 장기가 그냥 배양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실상은 복제된 클론, 즉 인간에게서 '빼내오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헤일셤의 교사들을 비롯한 일부는 그 클론들 또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지만, 에밀리 선생님의 말처럼 암을 치료할 수 없는 어둠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비록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고는 하나, 작품 속 인물들은 저항의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독자들은 혹은 관객들은 무기력한 인물들에 답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말해졌으나 말해지지 않은 진실, 그것을 알면서도 애써 피하면서 혹은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인물들은, 그 슬픈 삶과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웃고 울고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그 누구보다도 '인간다움'을 보여주었다.
소설에 비해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소설 초반에 캐시가 간병하는 기증자가 헤일셤에 대해 물어보는 장면이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원한 것은 헤일셤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가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낸 것처럼 헤일셤을 추억하는 - 17쪽' 기증자의 모습은 작품 전체를 말해준다. 인간이지만 인간임을 거부당했던 클론들, 그나마 헤일셤의 학생들은 다른 클론들에 비해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반면 영화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은, 루스가 이식 수술 도중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녀의 몸에서 장기만 꺼내 나가버린 부분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루스의 근원자를 찾으러 해변 마을에 갔을 때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던 모습, 맑은 웃음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