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공부가 생겨서 오랜만에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10분마다 딴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애써도 15분 이상 집중을 유지하지 못했다. 처음엔 단순히 ‘습관이 아직 안 잡혀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치,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때부터 내 핸드폰 알고리즘이 주접을 떨기 시작했다. 유튜브, 인스타에서 득달같이 ADHD 보조제를 추천해 주기 시작했다.
‘집중력 바닥이던 내가 이 약을 먹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본 순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성인 ADHD구나라고. 보통의 인간들이 그렇듯 나 또한, 결론을 내린 뒤에야 그에 맞는 증거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음날 바로 정신과에 갔다. 의사에게 증상을 이야기하니 adhd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첫날 뇌파 검사에 12만 원이, 다음 주에 실시한 ADHD 정밀 검사엔 10만 원이 들었다. 12만 원을 결제하고 나오는 길에, 묘한 자괴감이 들었다. 들어가자마자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우울하지 않다”라고 체크했는데, 20만 원의 지출이 생기자마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내가 너무 가볍게 온 건가? 집중력 검사 하나 받자고 20만 원을 쏟아붓는 게 과연 맞는 걸까? 하지만 최근 몇 가지 사건들로 조기 검진의 중요성을 절감했기에, 결국 예정대로 다음 주 검사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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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끝난 날, 의사는 결과지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약간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저는 평소에 이 검사를 약간 의심해 왔거든요. 지금까지 검사받은 분들이 전부 ADHD 판정을 받아서 그냥 하면 다 나오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의사는 말했다.
“이렇게까지 정상인 사람은 처음 봅니다. 오히려 평균보다 더 좋은 수치가 나왔어요.”
다행이면서도 억울했다. 검사는 주로 집중력이 요구되는 단순 반복 작업이었는데, 묘한 승부욕이 발동해서 ‘진짜 최선을 다해버린’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 같다. 결국 22만 원을 쓰고 나는 “당신은 괜찮습니다”라는 진단을 받은 셈이다.
“보통 adhd 분들은 머릿속에 본인만의 음악 플레이리스트가 있고 그걸 계속 재생하곤 하세요.”
그런 건 검사 전에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중에 의사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뇌파 검사상 스트레스와 우울 지수가 굉장히 높게 나왔어요.”
우울증이라고?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고, 사교성도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쩌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존재론적 의문을 가지긴 하지만, 내가 우울증이라니. 이런 게 가스라이팅이라는 건가? 나도 드디어 가스라이팅을 당해보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차트는 냉정했다.
교감, 부교감 신경은 망가져 있었고 스트레스 수치는 높았으며, 활력 수치는 낮았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완전 충전이 80%가 고작인 배터리로, 당신은 스스로를 120% 충전 가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요약하자면,
나는 삐걱거리는 배터리를 장착한 채, 자신을 모터사이클이라고 믿고 살아온 고장 직전의 전기 스쿠터 같은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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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는 방식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지금껏 스스로에게 과하게 채찍질해 온 사람이었다. 물론 타인이 보기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마저 벅찼던 모양이다. 나로부터 나를 감추며 살아왔다.
그게, 조금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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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우울증 약을 처방해 주었다.
“용량은 조금 높여서 드릴게요.”
우울증은 ‘우울함을 느끼는 병’만은 아니었나 보다.
‘아직도 나로부터 나를 감추며 살아가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공포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줬다. 혼자 술래이자 숨는 사람을 해야 하는 1인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니.. 난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