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25
꼬리를 축 내려뜨린 고양이 한 마리가 경내지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딱히 목적지를 정해 두고 움직이는 걸음새가 아니다. 말 그대로 정처 없이 이리저리하며 오르락내리락한다. 꼭 나 같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고양이를 따라다닌다. 나란히 걷지는 못해도, 어쨌거나 마음 맞는 도반과 같은 절의 경역을 거니는 중이라고 우겨 본다. 웬 인간 중생이 쫓아오는 걸 알았는지 고양이는 걷다가 이따금 멈추고, 내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으면 다시 발을 뗀다.
우리 엄마 연세뻘인 보살님 따라 꼬르륵대며 공양간에 갔던 옛날이 떠오른다. 어린이 불교 캠프였다. 나물무침 일색인 찬그릇 서너 가지와 찰밥 한 공기를 몽땅 비웠다. 고사리손으로 내가 사용한 식기를 말끔히 헹궜다. 인생 첫 설거지였다.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아주 깨끗하다고, 앞으로 훌륭한 어른이 되겠다고 보살님께 큰 칭찬을 받았다.
앞서가는 고양이와의 거리가 내 유년기만큼 멀다. 달음박질하면 금세 따라잡을 것 같지만, 놀란 고양이가 휙 사라질 게 뻔하므로 우리 사이는 좁혀질 수가 없다. 붓다가 되기 전의 싯다르타는 어린 시절 걸음걸음 땅바닥에 부용(芙蓉)을 피웠다고 하던데, 저 고양이는 네다리로 한 발 한 발 내 어린 시절을 흙 위에 올려 놓고 걷는 것 같다. 밥 잘 먹고 설거지만 잘 해도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었던 시절이 활짝 핀 연꽃처럼 소담스럽다. 이미 어른이 다 됐지만, 다시 어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번엔 진짜로, 좋은 어른이. 슬쩍 돌아보는 고양이의 옆얼굴이 동자불(童子佛)만큼이나 천진하다. 고맙습니다 묘보살. 재훈 합장.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