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평정

[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24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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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여느 날처럼 하느작대며 동네를 걷는데 시야에 뭔가가 걸린다. 작고 짙은 빛점 같은 것.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뭘 봤는지도 모르면서 일단은 찾아보기로 한다. 한 스무 발자국 떨어진 곳에 ‘그것’이 있다. 볕뉘처럼 은은히 반짝이는 것. 다름 아닌 꽃이다. 한달음에 그 앞으로 간다.

나팔꽃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자니 뭐랄까, 홀리는 기분이 든다. 자주색 불가사리가 다리 사이마다 보라색 피막을 펼친 것 같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잎이 여러 장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전부 붙어 있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 스마트폰으로 나팔꽃의 특징을 검색해 본다. 역시나, 얼핏 보면 다섯 잎 같지만 실제로 화순(花脣)은 하나라고 나온다. 나팔꽃이 갈래꽃이 아니라 통꽃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니. 내가 이 꽃에 대해 아는 거라곤 아침에 피었다가 그날 저녁 진다는 것뿐이었다. 꽃판의 기이함은 꽃술에 비하면 약과다. 하나를 다섯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자줏빛(혹은 보랏빛) 분신술 한가운데, 마치 일식이나 월식 때나 볼 법한 빛무리가 꽃술을 감싸고 있다. 꽃 안에 작은 우주가 들어 차 있는 모양새다. 요술 부리는 꽃의 본체이자 정념이 바로 저 중심부의 하얀 광환일 것이다. 그곳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분명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올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한참을 꽃 앞에 붙들린다. 보라색 나팔꽃의 꽃말이 ‘냉정과 평정’이라는데, 전혀 동의가 안 된다. 이토록 마력적으로 제 몸을 빛내며 사람을 홀리는데 어떻게 냉정이고 평정인가.

꽃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그날은 해거름을 넘어 평소보다 오래 돌아다녔다. 보라색 나팔꽃이 일몰과 함께 스러져 가고 있을 시간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꽃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하니 ‘냉정과 평정’이 옳은 꽃말인 것 같았다. 정작 꽃은 미련 없이 하루의 개사(開謝)를 벗어던졌는데, 사람은 기어이 그 꽃을 사진으로 남겨 보고 또 보고 있으니⋯⋯.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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