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2017), <타자의 추방>, 문학과 지성사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는 타자를 추방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었고, 이제 다시 그 타자를 초대하고 호출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온전함과 화해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설득의 과정 속에서 그는 칸트와 니체를, 하이데거를, 들뢰즈를, 레비나스를, 알랭 바디우 등 많은 철학자를 인용한다.
타자와 함께하는 방법으로 그는 환대와 사랑과 경청을 이야기한다. 다음은 <타자의 추방>에서 만난 문장들과 그 속에서 생각한 것들을 가볍게 정리한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이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며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우리를 제자리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여전히 같은 것. 같은 것 속에는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것이 없다. 우리 안의 결핍은 타자의 시선을 원한다. 그 시선, 그 인식은 자기 안의 결핍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 타자는 언제나 낯섦에서 시작할 수밖에.
난민에 대한 적대감, 지금 우리가 가지는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본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로 바뀐 것이라 말한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오로도 표현된다. 때문에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받고자 하는 자아는 이 과정에서 적을 발명해내고, 결국 적이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 된 것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나 자신의 척도, 나 자신의 경계, 나 자신의 형태를 획득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
우리가 가지는 타자에 대한 환상은 무엇인가. 이주자들과 난민들도 실제로는 실재하는 위협,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타자도 낯선 자도 아닐 수 있다.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대중은 북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반감을 느끼지만, 바로 이 대중이 북아프리카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칸트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요구한다. 모든 이방인은 다른 나라에서 체류할 권리를 지니며, 자신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한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고. 어느 누구도 지구 상의 어떤 장소에 있을 권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지 않다. 환대는 유토피아적 표상이 아니라 이성이 강요하는 관념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을 통해 충분히 타자를 환대할 수 있다. 환대(손님으로 머무를 권리)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이며, 우리는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다. 친절함은 그러므로 자유를 의미한다.
니체는 환대야 말로 너무나 풍요로운 영혼의 표현이라 했다.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과 공평함과 온유함은 보상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 타자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우리의 적대성은 보편적 이성의 결여를, 사회가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그런 시대의 정점에 있는 것 같다.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강요받는 진정성은 실로 나로부터 기인한 것인가의 대한 대답. 진정성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같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을 강요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신에 대한 강제를 만들어낸다. 영구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듣고, 자신을 엿보고, 자신을 포위하는 강제의 말, 그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관계를 더 갈고닦는 것이다. 진정성의 강제는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하고,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 것, 그 결과 다름의 진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키고, 오로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으로서, 잡다하고 다를 것 없는 진정성이라는 동일한 형태만이 존재한다. 누구나 타인과 다르고자 하는 태도는 이미 모두 같아서, 억압적으로 획일화하라는 명령보다 효과적으로 동형의 모습을 찍어낸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멋진 표현) 때문에 나를 설득하지 못하는 세계와 화해하기는 그른 것이고, 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오로지 나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타인은 소멸한다. 이 세계 속의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할 뿐이다.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울증은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 누적으로 인한 것이라 한다. 에로스가 빠져있는 세포들은 유기체의 생존을 위협하며, 에로스만이 유기체에 활기를 부여하는데,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고립화, 타자의 도구화, 전면적인 경쟁은 충족이 생겨날 수 있는 환경을 파괴한다. 나를 확인해주고, 인정해주는 시선이 사라지는 것이다. 안정된 자존감을 갖기 위해 나는 내가 타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며, 타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표상을 필요로 한다. 타인이 나를 만질 때에야 비로소 이 만짐을 거쳐 나를 만지고 나를 느낀다, 타인은 안정된 자아를 형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는 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모든 형태를 회피한다. 그리고 이는 자기 상해로서 부활한다. 타자의 부정성(낯설고 긴장하게 하는)을 추방하면 자기 파괴의 과정이 초래된다는 일반적인 논리의 정당성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기능하기와 실패하기 만을 존재하게 한다. 정신은 절대적인 분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획득한다. 부정성이 활력을 부여한다. 두려움은 주로 낯선 것, 섬뜩한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아주 다른 것의 부정성을 전제로 온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 죽음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헤어릴 수 없는 광활함을 처리하기 위해 이를 현존재로 끌어들인다. 죽음은 무를 담아놓는 함(상자)으로서, 심지어 존재 자체의 비밀로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죽음은 존재하기의 하나의 방식,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것은 그저 삶의 종말로 쉽게 종결된다. 우리에게는 깊은 권태가 필요하다. 깊은 권태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움켜잡으라고,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성질이 있다. 그것은 목소리를 가진다. 사유는 심연을 사랑한다. 사유에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향한 명료한 용기가 내재한다.
들뢰즈는 '바보 노릇 하기'는 언제나 철학의 기능이 있다고 했다. 이는 그것이 지배적인 것, 같은 것과의 단절을 실행하기 때문인데, 바보 노릇 하기는 순결한 내재성의 차원, 진리와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바보 노릇 하기 즉, 존재의 망각을 통해 그 이전에 이름 없는 것 속에서 실존하는 법을 배워, 다시 한번 존재와 가까워질 기회를 갖는 것이다. 자아가 세인을 주체로 내세워 타자를 기준으로 삼으면, 일상적인 두려움, 사회적 두려움이 생긴다. 하이데거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고유한 자기 존재를 택할 결단을 내린 현존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내부 지향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고유한 존재가 되는 방법. 하지만 두려움은 생산성을 높이므로, 신자유주의 세계는 이 두려움을 응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은 문턱에서 가지게 되는 전형적인 감각이다. 미지의 것으로 넘어가는 이행의 장소, 통과의례. 문턱은 타자에 대한 환상을 자극한다. 지금은 문턱이 사라진 시대. 디지털 소통은 이런 경계와 통과의례의 과정을 너무나 쉽게 무너뜨리고, 무디게 하고, 사라지게 함으로, 문턱을 너머 서며 감각하게 되는 그 거리를, 우리를 보호해주는 거리를 사라지게 한다. 그것은 투명성의 강제로 이름할 수 있다. 강제적으로 투명해진 이 세계는 모든 시각적 빈틈과 정보의 빈틈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전면적인 가시성에 내어놓는다. 후퇴와 보호의 공간을 모조리 제거하여, 위협적일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어버린다. 결국에 우리는 그저 통로로 머물러, 우리 자신의 내면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존재하지 않다면, 나와 너의 존잴 과연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관계가 연결로 대체된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으니 소외로서의 타자도 사라진다. 노동에 있어서 역시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과 행위에서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의 말속에서 다만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인간이 신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할수록 인간 안에 남아있는 것은 줄어든다는 것,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대상 속에 투여하나 이제 그의 삶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 되는 것이 마치 종교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것은 종교를 정말 너무나 단편적으로 접근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신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할 때는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더 큰 이상을 보고자 하는 것이지, 자신의 것을 종교에 다 밀어 넣고 텅 비고자 함이 아니다. 자기 안의 신을 발견하는 것, 신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 그것이 신앙인데, 뭐랄까 종교를 그저 맹목적인 것으로 서술한 것 같아서 불편한 지점이 있었다.
어쨌든, 이어가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착취는 소외나 자기 탈 현실화가 아니라 자기 최적화로 진행된다는 것. 나 스스로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착취자로서의 내가 존재하는 것,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하는 것. 소진에 대한 열망. 이 부분에도 몹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기는 한지, 내 안에 축적된 세상의 욕망인지, 저자는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는 제니 홀저의 말을 끌어와 동의한다.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 타자의 음성과 시선에 감염되지 않는 상태에 우리는 익숙하다. 디지털화되어버린 소통의 세계 속에서(사실 본문은 인터넷 소통의 긍정성에 대해 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는데-디지털이 이루어낸 시민혁명 이라든가-어쨌든 본문은 인터넷이 관계를 관계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심하게는 어떤 단절의 도구로서만 묘사한다) 관계와 만남은 음성과 시선의 특별한 경험의 결핍을 가진다. 몸들의 경험. 유혹을 낳는 것은 기의로 환원될 수 없는 기표의 과잉. 유혹은 기표가 기의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유통되는 공간에서 일어난다. 기의로는 풀어낼 수 없는 기표의 잉여가 비밀이다. 기표는 폭로할 수 없다. 그저 유혹에 머물러서는 어떤 것에도 가닿을 수 없다는 걸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기의, 타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 그 기의에 가까워진다는 것. 그 수많은 기표들 속에서 진짜 우리가 알아채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예술에 있어서는 어떨까.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 거라고. 부정적인 긴장은 예술의 본질. 음전압! 편안함의 예술이란 없다. 철학의 계기이자 정신 자체에 내재된 것,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라고 설명한다. 이 시대에 너무나도 쉬운 좋아요라는 동의. 나 역시도 이전에 좋아요를 누를 때는, 내가 이 이야기에 동의하는가에 대해서 잠시 멈춰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저 가벼운 격려와 응원으로, 너무도 쉽게 클릭. 그건 그것대로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는 것이고,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정신을 고양할 수 있다고, 관계를 이루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지적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정말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점점 충분해지는, 더 이상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 그 낯섦에 나 자신을 던지는 것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경이'의 순간들. 경이를 허락하지 않는 디지털 화면. 주관적 정신의 확정적인 네트워크로부터 타자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그 낯설게 하는 경이로운 다름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알랭 에랭베르는 자기 존재의 피로가 우울증이라 했다. 이 존재론적인 짐이 무한히 무거워지고, 짐의 최대화는 생산성의 최대화로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작동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결코 피곤해지지 않는다, 지칠 줄 모르는 능력,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음의 강조가 현존재의 자기 존재론을 지배하고, 죽음까지도 훌륭한 가능성으로 간주한다. 레비나스는 죽음과 에로스를 할 수 있음으로는 절대로 번역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라고 했는데,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이 수동성이 타자에게 접근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자아의 의지만으로는 자아의 행동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타자에게 닿는 길이 되는 것이다. 타자를 위한 피로, 이것은 자아의 피로가 아닌, 근원적인 무력감, 근본적인 수동성, 타자의 시간, 형이상학적 허약함, 타자 앞에서 허약함, 존재의 약점으로 존재한다. 이 부정성을 껴안아야 한다.
에로스만이 자아를 우울증으로부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얽혀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타자는 구원으로 가는 공식과 같다. 레비나스는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있게 되는 것이라 했다. 그런 면에서 이것 또한 예술.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랑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라는 질문!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그저 껴안을 것.
이원성 없이 우리는 자신 안에서 익사하고 만다. 나르시시즘적 핵융합은 생명에 위협이 된다고. (후훗)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둘의 무대라 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 이전에 해보았던 것들도 지금의 관계에서는 온전히 새로워진다. 전혀 새로운 타자와 함께선 무대는 새로운 시야로 세상으로 나를 이끈다.
타자를 껴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청이다. 이제 우리는 경청이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필요한 지경. 미하엘 엔데의 <모모>의 주인공 모모는 거의 직업으로서의 경청자이다. 오로지 모모는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어 타자의 시간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해답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인의 현존재에 대하여,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나의 행동이자 참여로, 그렇게 나와 너는 연결되고 공동체가 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경청의 집단이고 그 속에는 친근함이 깃든다. 경청은 엘리아스 카네티에 따르면 인내의 수동성이 요구된다. 이는 침묵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온전히 타자에게 몰입함으로써 타자가 공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타자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그를 환대하고 환영하고, 그의 다름을 긍정하는 것, 그를 말하기로 초대하여 자신을 드러내도록 돕는 것, 그 속에 치유의 힘이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넘쳐나는 커피가게들 속에서도 앉을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서로 말하기와 듣기를 하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흘러가는, 혼자만의 울림과 말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많은 트윗들을 보라.
환대는 이성의 영역. 우리는, 그러니까 나는 나와의 관계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를 형성하므로, 또 사회와 화해하기 위하여, 나의 이성을 작동하여 타자를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환대로 나아가는 것은, 타자와의 경계, 거리를 확보하는 것으로부터, 그 다름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온전해지고, 가장 높게는 사랑함으로, 에로스를 통해 가까워질 수 있다. 타자와의 다름을 서로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다름 아닌 경청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 얇고도 무거운 책을 통해 많은 철학자를 만날 수 있었던게 기뻤다, 각각의 철학자들의 글도 직접 만나보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