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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Jun 01. 2018

중력과 은총 : 하나

시몬 베유, 1952

서른 넷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1909~1943).


나이가 통찰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사유를 깊게하는 것은 어느정도 동의되는 바이므로, 서른하나에 써내려간 그녀의 단상은 아마도 철저히 스스로 처한 노동의 현장에서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은 결과같다.


그녀의 언어 속에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빼곡하다. 특히 신과의 관계 속에서의 인간.


영감을 받은 구절들을 모아봤다.


타인도 자기와 똑같이 고통받기를 바라는 욕망. 이것은 사회의 안정이 유지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16쪽)


때때로 과시하는 태도의 나 자신을 보아도 그렇고, 자랑이 넘쳐나는 사람과의 대화는 늘 피로하다. 처음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만, 금새 미움과 비난에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남들만큼 살고자 하나 그 욕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 같이 자멸하는 길을 택하는 예는 의외로 흔하다. 최근 NT Live로 만난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러>의 여주인공은 스스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할 바에야 그 상대를 산산히 부서트린다. 애초에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서로 물고 뜯는 굴레가 사회를 유지시키는 거라면 정말이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우리가 신을 사랑하는 것이 수전노가 재물을 사랑하는 것과 같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신은 어두운 밤을 통하여 모습을 감춘다. 죽은 오레스테스를 애통해 하는 엘렉트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신을 사랑할 때 비로소 신은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33쪽) 자기 안에 신을 갖지 않는 자는 신의 부재를 느낄 수 없다. (50쪽)


신이 없음을 인정해야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역설. 자신의 안에 신이 필요함을 인지하고 존재하지 않음을 느낄 때, 그래서 절실히 그 존재를 바랄 때, 신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비로소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려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해 본다. 신이 애초에 내 안에 있지 않았다면, 부재를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이, 신의 부재를 인지하는 것이, 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 되는 것.  


매 순간 우리의 존재는 곧 우리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신은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이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해 주는 신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겠다고 동의할 때 우리를 사랑한다. (58쪽)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드러나므로(62쪽) 내가 무가 되면 신은 나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이상의 글과 더불어 거울에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인은 분명 자신이 그 모습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못생긴 여인은 그것이 자기 모습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는 비유가 등장하는데, 재미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내안에서 나를 비울 때, 그 안에서 신이 신을 발견하는 것, 창조때부터 불어넣었던 자신의 생기, 생령을 도드라지게 하는 일.


그 힘겨움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말고 그것을 사용할 수있는 은총을 기원해야 한다. 그 비참함을 변화시키는 은총을 기원할 것. 인간의 비참함은 지혜로 통하는 문(63-64쪽)


우리에게 처해진 고난, 힘겨움과 비참함에 대해 그녀는 비참함 자체를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 그 비참함이 우리를 어디로 나아가게 할 것인지를 이해하고 구할 것을 권한다. 이어서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면서, 신은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했지만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을 것이라(68쪽) 말하는데, 몹시도 위로가 된다. 우리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 비참함이 우리로 구원으로 향하게 하는 통로가 되게 구하라는 것.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소유할 뿐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상황이 빌려준 것일 뿐.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잊는 교만, 그것을 가리는 비참함이라는 장막, 신이 있는 쪽에 신안에 신이라는 나는 나에 대하여 감추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68쪽)


존재와 소유. 여기서 인간이 소유하는 것.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신'이다, 우리 안에 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교만이라 말하고, 그것을 잊게하는 것은 '비참함'에 대한 집착. 비참함의 너머를 생각하지 못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까. 그녀는 확실하게 '겸손이란 신 밖에 존재하기를 거절하는 것'(72쪽) 이라고 못박고 있다. 우리의 겸손은 신밖에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겸손이라기 보다 ‘절박함’ 같다, 그러지 않고서, 신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고서 이 세상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고로.


같은 맥락에서(라고 해석 되는데), 그녀는, 신이 우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동의, 신이 통과하도록 하는 동의, 사랑외에,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이가 자신의 선물을 사도록 돈을 주는 것과 같다(73쪽)고 비유하고 있다.


필연을 사랑할 것. 우주의 필연이 인간을 그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가능이 필연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들을 간파해 낼 것. (77쪽) 신은 '위하여'라는 말 앞에 놓일 수 없다(81쪽) 필연에 대한 복종.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86쪽)


실은 모든 것이 필연이길 간절히 바라지만, 필연을 확신할수 없는 무지, 두려움이 복종을 가로막는 것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필연을 알아채는 직관, 그리고 신을 위하는 일따위는 없다는 것, 그럼 이미 그는 신이 아니겠지,


상상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도록 해 볼 것.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것.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신을 사랑하게 된다.(94쪽)


이건 사람을 사랑할 때도 그렇지 싶다, 하지만 가능한지는 모르겠고, 늘 그 상상의 실패로 인해 나는 혼자인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상상이 사랑을 가능하게, 시작할 수 있게 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진실한?! 사랑은 아닐지언정, 어쨌든 그녀는 어떤 이상, 바람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인지할 때 비로소 사랑이라 일컬을 만하다고 본 것 같다.


우리가 신에 다가갈 수 있게 하지 못하는 학문은 가치가 없다(98쪽) 내 사유의 시선이 감당 할 수 있는 한, 나는 나의 결함이 송두리째 내 눈앞에 드러나기를 바란다. 나의 결함이 치유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사 치유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리 안에 있기 위해서이다.(101쪽) 신이 강제로 나를 붙잡아주길(103쪽)


우리의 결함이 우리로 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 나 역시 기도하는 것은, 신이 나를 포기하지 않기를(물론 그런 분이기도 하고), 나를 붙잡고 놓지 않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그녀의 글은 마치 편지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하다, 그래서 설명적이지 않고 선언적인 문체, 묘하게 맥락이 없는 단상같으면서도 맥락을 너무나도 잘 갖추고 있어 놀라게 되는, 논리적인 역설이랄까, 그녀의 머리 속에 신과의 관계가 그려진 길을 같이 걸어가는 기분이다,


밑줄이 너무도 많아서 오늘은 이만큼만 정리,


언젠가?! 이어질 2편에서 계속 됩니다,


시몬 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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