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롱 Nov 07. 2022

이제 그만 끝낼까 해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2020

이전부터 봐야지 했는데, 뭔가 마음을 먹고 봐야만 할 것 같아서 미뤄두었던 영화. 사전 정보 없이 그저 매력적으로 보이는 색감과 강렬한 포스터에 마음을 빼앗겨서 찜 목록에 추가해두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찰리 카프먼이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였다. 예견된 난해함. 하하.


출처 : Daum  영화 스틸컷(이하 동일)


영화가 시작되고, 역시나 강렬한 색감과 여주인공의 독백이 공간을 가득 메우듯 꽉 차서 어느새 집중.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한데, 단순하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어느 날, 여자는 제이크라는 남자 친구와 함께 그의 부모님을 만나러 길을 떠난다. 첫 장면의 환한 색감과 쨍함, 밝고 따뜻한 미소와 대화는 눈길 속을 드라이브하며 가는 동안 점점 잿빛으로 변하고, 여자는 그와의 이별을 생각하며 제이크와 다소 어긋난 대화를 나눈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이름을 한 친구들이 계속해서 전화와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그녀는 그것을 확인하기를 피한다. 눈길을 뚫고 부모님이 계신 교외의 농장에 도착한 그들은 가축들이 있는 우리를 먼저 둘러본다. 그곳에서 꽁꽁 얼어붙은 죽은 양의 사체와 구더기가 들끓는 것도 모른 채 방치되다 죽은 돼지의 사체가 놓였던 검은 얼룩을 바라보며 둘은 이야기를 나눈다.


집에 들어선 두 사람. 2층에 계신 부모님은 불러도 좀처럼 내려오지 않아 둘은 어색하게 부모를 기다리며, 부모님이 키우는 개와 벽에 붙은 어릴 적 사진들을 둘러본다. 어딘지 모르게 기괴한 분위기. 개는 자기에게 뭍은 눈을 미친 듯이 털어대고, 자기 사진이라는 제이크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이라 여긴다. 그제야 내려온 부모님은 기괴한 웃음과 어색한 농담과 친절한 듯 차가운 태도로 그들을 맞이하며 그들을 식사 테이블로 인도한다.



엄마의 손길, 엄마의 말 한마디에도 까칠하게 구는 제이크. 여자 친구는 무엇을 하는지,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묻는 질문에, 그녀의 직업은 화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이름도 직업도 자꾸만 바뀌어 헷갈리기만 하다. 거실로 옮겨 후식도 먹고, 어린 시절 제이크가 썼다는 방을 둘러본다. 방에는 그가 읽은 책과 영화와 음악과 그를 채우고 있는 잡다한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엄마의 지시로 여자는 가기를 꺼렸던 지하실에 내려가 똑같은 작업복 여러 개가 세탁기 안에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고, 여자가 그렸다고 보여주던 그림이 실은 제이크의 서명이 달린 채 지하실에 놓여있음을 본다.


여자 친구 앞에 불쑥 나타난 그들 부모의 얼굴은 갑자기 노인의 얼굴이었다가, 그들 나이 또래의 젊은 부부였다가, 숨을 거둔 채 병상에 누워있다가 한다. 늙은 엄마는 제이크에게 천재보다는 성실한 것이 더 낫다, 네가 훌륭하다는 류의 이야기를 반복한다.


중간중간 학교를 청소하고 관리하는 한 노인의 일상이 갑자기 끼어든다. 그는 외로워 보이고, 홀로 식사하고, 홀로 영화를 보며, 홀로 바닥을 닦는다. 노인의 눈에 못된 아이들, 외로운 아이들이 스쳐간다. 노인의 환상인 듯, 공연을 준비하는 듯, 빈 복도에서 춤을 추는 이들.



드디어 농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발은 이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지고. 여자는 그녀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녀 안에서 자꾸만 그와의 어긋남을 발견한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많은 말들은 결국은 그의 방에서 보았던 그 무수한 것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관객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그녀의 얼굴마저 순간 변하는 장면도 있다) 중간에 들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차가운 미인들이 그들을 관망하고, 늙은 청소부의 곁을 지나가던 외로운 소녀가 아이스크림을 채워 그녀에게 건네며, 꼭 앞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다. 제이크는 이상하게도 그 가게로부터 자기는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라며 그 가게의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는다.


둘은 다시 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너무나 달달한 아이스크림은 미처 다 먹지 못해 녹아간다. 제이크는 그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견딜 수가 없다.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근처 학교에 아이스크림을 버리러 들른다. 아이스크림을 버리고 돌아와, 둘이 키스를 나누던 중 누군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며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학교로 향하는 제이크.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여자. 늘 거절하지 못하고 더 쉬운 선택을 해온 자신의 연애를 탓하다, 그를 찾으러 학교로 들어간 그녀. 학교로 들어가는 계단 옆 쓰레기 통에는 오랫동안 무수히 버려진 아이스크림 통이 가득하다.



거기서 그녀는 늙은 학교의 청소부를 만나고, 제이크를 만나고, 그들과 꼭 같은 옷을 입은 댄서들을 만나고, 그들의 춤을 보고, 댄서의 죽음을 본다.


일을 마친 늙은 청소부는 자신의 차로 돌아와 그 모든 시간들 속으로 모든 옷을 벗어져 치고, 구더기가 들끓는 돼지를 따라간다. 그리고 단상 위, 갑자기 한 편의 연극무대가 펼쳐진다, 늙은 분장을 한 제이크는 물리학상을 받아 수상소감을 전하고 그의 어린 시절과 외로움을 노래하며, 역시나 늙은 분장을 한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의 박수를 받으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빛나는 아침, 학교 앞에 주차된 하얗게 눈이 뒤덮인 차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쓰고 보니 정말 더 단순하지가 않다.


다른 리뷰들도 찾아보았는데, 늙은 청소부가 제이크 자신이라는 것. 그가 자신의 삶을 그의 머릿속으로 되감기 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며 홀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거라는 해석이 가장 동의가 되었다.



영화의 시작,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제이크와 그의 여자 친구의 출발 장면을 바라보던 장면이 다시금 기억이 난다. 그들을 바라보던 늙은 제이크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한 시절을 새롭게 구성해보는 것이다. 그가 바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그녀는 자신처럼 지적이고, 취향이 확고한 여성이라는 상상. 그녀와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눌 거라는 이런저런 가정들. 그런 그녀를 부모에게 소개하는 그런 날에 대한 기대. 그의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버린 엄마, 아빠의 초상. 그들의 젊음과 늙음. 그를 조롱하던 과거와 현재의 모든 차가움들. 그 수없는 상상은 버려진 아이스크림 통의 개수만큼 무수히 재생되어 그의 시간 안에 켜켜이 쌓였고. 그런 생각의 반복을 살아가는 일상마저 이제는 그는 그만두기로 한 것 같다. 그는 그를 짓누르던 그 모든 것을 실오라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벗어던진 채, 아무도 곪아가는 줄 모르게 홀로 죽어간 돼지를 따라 그의 마지막 무대에 오른다. 그는 그의 마지막 상상의 무대에서 그를 둘러싼 그 모든 이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노래하고 박수를 받으며,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살인과 피가 낭자하고, 유령이나 괴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토록 차갑고 무서운, 두렵고 기괴한 감정을 갖게 하는 영화라니, 낯설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영화였다. 그 모든 장면을 이해해서라기 보다도, 그 모든 장면이 느껴지는 기분.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대화, 이루어지지 않은 꿈들, 끝없는 고독, 누구도 크게 원망할 수 없는 자신의 외로움에 대한 자책,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의 반복. 어떤 괴리들.

 


스무 살 시절이 떠올랐다. 이렇다 할 어려움이 없는데도 모든 게 너무 힘겹고, 끝없이 잠기는 기분이 들던 시절.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이상한 글들을 써대고 홀로 그냥 울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에서 내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그저 시간이 흐르고 늙어버린 어느 날, 그 지난 시절을 떠올리는 늙고 초라한 자신을 바라보면 어떨까. 늙은 청소부 제이크가 느꼈을 공포, 그에게 죽음은 그 공포로부터의 해방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그 수많은 후회와 미련과 낡은 희망을 반복하는 일에 지쳐버렸을 것이다. 영화 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결국에는 모두 제이크의 다름 아니다. 그를 대신해 춤추던 댄서의 죽음을 보며, 그 격렬한 자기와의 다툼 끝에 그는 이제 그만 끝을 맺기로 한다.


살며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공포라는 게 있다면 꼭 이 영화의 모습 같은 게 아닐까. 임신 중인 내가 보기에는 꽤나 우울한 영화였지만, 모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부디 삶의 어떤 고독과 외로움들도 제대로 바라보고 보살필 줄 아는 사람으로 나의 아이를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다소 생뚱맞은 생각을 하며. 지난 주말의 명화 리뷰.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