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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Oct 31. 2023

<하나식당>, 최낙희 감독

그리고 한병철 <피로사회>


“너무 열심히 하지마. 병들어 세희야. 적당히 해서 즐거우면 됐지 뭐. (중략) 내가 행복해야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먼저인 게 정답이야.”

- 영화 <하나식당> 중 하나의 대사


때로 20대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


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거나, 곧 취업 ‘전선’에 나아갈.


자신보다 10살 안팎쯤 더 든 나에게 대개는 이런 것을 물어온다.


“00이 되려면 지금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좋을까요?”


“스펙을 쌓거나, 인턴을 하면 도움이 될까요?”


“저는 인턴을 한 번도 ‘못’ 해봤는데, 취업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20대 때 꼭 해야 할 하나는 무엇일까요?”까지.


일단, 내가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 나이가 되리라고는‥)


다음으로,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답을 모른다. 흑.


그럼에도 그렇듯 어려운 질문을 던져놓고 눈망울을 빛내며 내 입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상대에게 “글쎄요..” 정도로 갈음하기는 서로 맥 빠지는 일이라.


결국 내가 보고 듣고 겪은, 내 살아온 발자취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협소한 답이나마 최선을 다해 전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느린 편이다.


걷는 속도도, 먹는 속도도 느리고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적응하는 속도도 느리다.


책을 읽다 마음에 닿는 문장을 만나면 몇 번이고 곱씹어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어떤 장면에서는 ‘정지’ 버튼을 눌러놓고 하염없이 감상을 뻗어나가야 직성이 풀리니, 한 시간짜리 드라마를 두 시간, 세 시간 걸려 보는 일이 예사다.


이런 것쯤이야 가끔 불편하기는 해도 큰 어려움이 되지는 않는다. 가끔은 낭만적이기도 하지.


지금까지 나를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했던 것은 ‘남들보다 느리다’는 것이었다.


20대. 남들은 일찌감치 다니는 취업 학원을 ‘아예 안 다니기는 좀 불안하지 않아?’라는 말을 셀 수 없이 듣고 나서야 겨우 등록했다. 사실 그다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인턴은 번번이 떨어지는 바람에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하긴. 그 시절 같은 분야 취업 준비생끼리 알음알음하던 공부 모임, 이른바 ‘스터디’조차 영문 모른 채 ‘불합격’ 통보를 받고는 했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스터디 하나를 하려고 해도 스펙이, 경력이 필요했다.   


‘나는 언제 인턴 한 번 해보나’하는 걱정은 세월에 밀려 ‘인턴 못 했다고 취업도 못 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걱정으로 바뀌어갔고, ‘도대체 세상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한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지금껏 잘못 살아온 것일까’와 같은 자학으로 나아가며 스스로를 무너뜨렸다. 돌이켜보면 20대를 뒤흔드는 위기 요소란 참으로 전방위적인데 그 가운데 그나마 분명한 어휘로 표현 가능한 것이 ‘취업난’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같이 취업을 준비하던 친구들이 하나둘 취직하는 동안 난 나이 서른을 목전에 두고도 ‘정규직’을 달지 못했다.


어둡고 춥고 스산했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니 그 시절에도 봄, 여름은 있었을 텐데, 참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그때의 계절은 가을과 겨울뿐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발로 스치며 걷다 보면 하늘 한 구석 새로운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낙엽 하나가 차게 또다시 저를 떨구던 밤. 옷깃 여민 채 아무리 바지런히 걸어도 언 땅의 한기가 뒷목까지 올라오던 밤. 온통 밤으로.


한데, 그 숱한 밤도 지고, 지나갔다. 지난 후에는 한동안 그런 밤이 있었는지조차 잊었다.


어떻게 떠나보낼 수 있었는지, 글쎄 정확히 헤아리지는 못하겠다. 그저 남보다 느렸던 나의 시간을 가만가만 반추할 따름이다.


“저도 아직 뭘 하면서 살지는 모르겠지만요. 저한테 시간을 좀 주려고요. 일단 당분간은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 찾아보려고요.” (세희)

“그래, 편하게 생각해. 그 나이 땐 그냥 무조건 한 번 해보는 거야.” (하나)

 - 영화 <하나식당> 중 세희와 하나의 대화


글이 영화 <하나식당>의 대사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잠시 영화 이야기.


영화 <하나식당>은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작은 식당, ‘하나식당’에 찾아오는 여러 손님과, 식당 주인 37살 한국인 여성 고하나의 이야기이다.


하나식당에서는 그날 시장에서 사온 적은 재료 가운데 손님이 고른 재료를 이용해 때마다 다른 요리를 만들어주는데, 때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객에게는 하루, 또는 기약 없이 빈 방을 내어주기도 한다.


어느 밤, 주린 배와 곯은 마음을 끌어안고 이 식당에 당도한 한국인 손님, 26살 세희에게 하나는 기꺼이 깃들어도 좋다며 밥과 방을 내어준다.


냉정한 한국 사회, 인생을 두고 벌이는 속도 경쟁에 완전히 지쳐버린 세희의 곯은 마음속, 잔뜩 웅크리고 있던 어둠을, 하나는 세희를 보자마자 읽어낸 것이다.


‘무엇이든 가능한’ 하나식당이라는 공간을 거쳐, 영화 속 여러 인물은 속도보다는 ‘방향’에 맞추어 제 삶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시 나아갈 힘을 회복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보는 이에게도 저마다의 하나식당을 찾게 해주고 싶었으리라.


“나도 저 때가 있었나 싶다” (하나)

“저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세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보여지는 게 더 좋았던 거지. 좋을 거 하나 없는데 말이지.” (하나)

“그러게요. 좋을 거 하나 없는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누릴 걸” (세희)

 - 영화 <하나식당> 중 하나와 세희의 대화


다시 돌아와서.


결국, 지나고 보니 내게는 ‘조금 느려도 괜찮다’, ‘조금 누려도 괜찮다’는 답이 남았더랬다.


그게 정답이었냐고? 그걸 어떻게 장담해.


다만, 더 깊이 숨 쉬고 사유하는 것이 언제나 내게는 더 필요했다.


30대. 난 여전히 남들보다 느리고, 있었는지조차 잊었던 시리고 캄캄한 밤이 요즘 부쩍 나를 다시 두드려온다. 그 밤은 그때와 다르지 않게 전방위적인데다 정체가 잘 해석되지 않아 어린 시절보다 나이 든 나에게 여전히 날카롭다.


“그래 언제든지 또 와. 갈 데 없거나, 배고파서 와도 괜찮고.”

- <하나식당> 중 하나의 대사


현생에서, 내게 고민을 털어놓은 귀한 분에게 난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꼭 이 말을 덧붙이고는 한다.


“물어보고 싶은 게 생기면, 고민되는 게 있거나 어떤 이야기라도 하고 싶으면, 주저 말고 연락해요. 그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


이 글을 쓰다, 한때 내게 이야기를 구했던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늘 취업 고민을 털어놓던 그였는데, 이번에는 사랑 고민이었다.


그에게 드린 답은 여기서 고백하건대, 사실 나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투성이다. 멋있고 ‘쿨’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했다.


차치하고, 다시 내게 물어와 준 그가 어여뻤다. 고마웠다.


나는 또 말했다. 언제든지 또 오라고. 밥이라도 먹자고.


그의 앞날이 따뜻하길, 반짝이길, 행복으로 가득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만의 하나식당을 꼭 찾을 수 있기를.


느리고 따뜻한 <하나식당> 속, 가장 환한 빛 번짐을 안겨준 대화로 글 마친다.


“이렇게 따뜻하고 편안한 아침 식사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조금 어색해요.” (세희)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더 좋지. 나한테도 이런 아침이 다시 오네.” (하나)

- <하나식당> 중 세희와 하나의 대화

[번외]


"30대. 난 여전히 남들보다 느리고, 있었는지조차 잊었던 시리고 캄캄한 밤이 요즘 부쩍 나를 다시 두드려온다. 그 밤은 그때와 다르지 않게 전방위적인데다 정체가 잘 해석되지 않아 어린 시절보다 나이 든 나에게 여전히 날카롭다."


책 <피로사회>의 저자는 21세기 사회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고 했다. 성과사회의 주민은 성과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라고 했다.


그런데 성과사회에는 ‘시스템의 폭력’이 내재돼 있고, 이 폭력은 ‘심리적 경색’,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나 성과를 향한 압박을 야기한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로서의 자아. ‘경영’의 사전적 의미는 ‘기업이나 사업 따위를 관리하고 운영함’, ‘기초를 닦고 계획을 세워 어떤 일을 해 나감’ 등이다.


모든 조건이 자유로운 상황에서 오로지 나 혼자라면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로서의 자아는 행복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도 공평하지 않은 사회 구조 안에서, 남과 무한 경쟁하며, 자기 자신을 경영해야 한다는 것은 기실 자해행위에 가까운, 저 자신을 향한 슬픈 몸부림으로 느껴진다.


자신이 속한 가족, 친구, 회사, 사회 나아가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서 인정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삶. ‘자기 PR 시대’라는 말. ‘본캐’만으로도 부족해서 ‘부캐’를 키워야 하거나 ‘본캐’가 가면이어서 ‘부캐’로 탈출해야 하는 과잉, 분열. “나는 이런 사람이야” 여기저기서 외쳐대는데도 내가, 당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조금도 알 수 없는 모순.


나는 자꾸만 작아지고 작아져 콩알만 해졌고, 스스로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더 필요했는데 일상은 너무도 빠르고 바빠 해석할 시간이 부족했고, 아마도 밤은 그리 다시 찾아왔을 것이다.


<피로사회>의 저자는 성과사회의 ‘피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중략)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그러면서


“함께 ‘지쳤다’고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아쉬움을 남겼다.


“이렇게 따뜻하고 편안한 아침 식사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조금 어색해요.” (세희)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더 좋지. 나한테도 이런 아침이 다시 오네.” (하나)

- <하나식당> 중 세희와 하나의 대화


어쩌면 이번에 찾아온 밤을 무사히 떠나보낼 방법은 이 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우린 지쳤어. 지금보다 조금만 느리게, 조금 더 누리며 같이 있자”

* 사진 출처: 영화 <하나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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