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밝힐 Sep 18. 2022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2화

“사실 나 한동안 책을 안 읽었어.” (해원, 배우 박민영)

“왜?” (은섭, 배우 서강준)

“책이라는 게 어떤 이야기를 담은 거잖아.그래서 그 안의 사람들이 막 갈등하는 게 난 좀 힘들더라고. 나 사는 것도 충분히 바쁜데 다른 사람들 힘든 것까지 챙겨야 하나 싶어서” (해원, 배우 박민영)

“그럴 수도 있겠다” (은섭, 배우 서강준)

-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중에서

나는 5년차 직장인이다.


부끄럽지만, 지난 5년 동안 책 한 권 완독(完讀)한 적이 거의 없다.


어릴 때는 책 읽는 것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아이였다.


초등학생 때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신발도 벗지 않고 방바닥에 엎드린 채 책을 꺼내 읽어서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신발을 벗겨주기도 했고,


중학교 때는 여러 역사 소설과 J.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고등학교 때는 김진명, 히가시노 게이고, 기욤 뮈소의 소설을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에 다니면서는 사회과학 도서, 그리고 영화 서적과 시를 주로 읽었다.


지금, 잠시 나의 책장을 본다.


<눈 먼 자들의 국가>

<민주주의 잔혹사>

<제주4.3을 묻는 너에게>

<누군가 당신의 방황에 함께 하기를>

<내게 무해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82년생 김지영>

<대한민국넷페미史>

<여자 없는 남자들>

<아버지의 특별한 딸>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이갈리아의 딸들>

<기록되지 않은 노동>

<새로운 조선을 꿈꾼 여인, 강빈>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마음이 살짝 기운다>

<더 테이블>

<그녀가 말했다>

<90년생이 온다>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전부 다 적을 수는 없어서 일부만 나열해보았다.


대부분은 직장인이 되기 전에 읽은 것들이고 일부는 그 이후에 사거나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것들이다.


아, 맞다. 이런 책들을 읽었지. 어렴풋, 풋풋하다.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한지승 장지연 연출, 한가람 극본, 이도우 원작)> 2회를 보고 있다.


주말이었다.


약 2주 전부터 정주행하던 다른 드라마를 낮에 끝내고,


낮잠을 한숨 자고,


깨어보니 여전히 해가 부셔서

맑고 말간 가을 햇볕이 문득 아까워져서

부산하게 빨래를 해 널고,


저녁을 먹고 씻은 뒤,


이부자리에 누워

다시 OTT 플랫폼을 켠 것이었다.


‘이제 무엇을 시작해볼까’ 둘러보다가


‘너무 드라마만 보나..’ 머리맡에 놓아둔 책들을 잠시 바라봤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보단 이게 더 끌렸다.


‘서울 생활에 지쳐 북현리로 내려간 해원이, 독립 서점을 운영하는 은섭을 다시 만나게 되며 펼쳐지는 가슴 따뜻한 힐링 로맨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소개 문구였다.


‘서울 생활에 지쳐 북현리로 내려간 해원이’


내 눈을 끈 것은 이 부분이었다.


나도, 지쳐있으니까.


나는 5년차 직장인이다. 그리고, 5년째 지쳐있다.


정신 없이 1, 2년차를 보내고 난 뒤


3년차 즈음부터는

‘이렇게 지쳐 있을 수 없다. 앞으로 30년도 넘게 회사를 다녀야 하잖아!(세상에..)’

란 생각에 뭐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래 글도 써보려고 했고,

운동도 해봤고,

여행도 다녀봤고,

해본 적 없던 취미에도 도전해봤다.


어떤 것은 도움이 되기도 했으나 잠시뿐이었다.


요즘은 그냥, 이 지쳐버림에 저항하지 말고 그저 받아들여 볼까 싶어진 상태였다. (이 생각이 또 언제 다시 바뀔지는 모르겠다.)


완전히 지쳐버렸으니까. 그렇다고 새로운 내일이 올 지는 모르겠고, 아마 내일은 더 지쳐버릴 것이라는 게 훨씬 더 개연성이 있으니까.


그냥 나 같은, 지친 사람의 이야기를 보자,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꽤 괜찮은 선택인 것 같았다.


드라마의 주된 배경은 텅 빈 시골 마을 북현리. 머리가 편안해졌다. 소리도 적고 작아서 맘에 들었다. 마음이 갈앉았다.


동창회 할 만한 작은 횟집이라도 나갈라치면, 버스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하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사정들을 헤아리고 있는 작은 동네.


시골길에 선 해원이 한숨처럼,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실 때, 나도 마치 그곳에 있는듯 가슴을 열고 큰 숨을 한 번 들이 마셨다.


좋았다.


무난하게 2회까지 보다,

보다,

그러다 눈물이 흘러버렸다.


북현리 사람들의 소소한 독서 모임.


시 한 소절, 책 한 구절을 나누어 듣고

동네 할아버지가 워주신 귤을 나누어 먹는 따뜻함에 마음이 일렁이던 .


약국집 딸 18살 현지가 엄마 잔소리에 쫓기면서도 주머니 가득 훔쳐온 핫팩을 (나는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 현지가 추워서, 또는 심심해서 핫팩을 훔치는 줄 알았다) 귤을 굽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건낼 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아이고, 착해라’란 말이, 눈에선 뜨뜻한 눈물이 흘렀다.


해원은, 웃고 있었다.


서울에서 북현리로 내려온 이후, 얼굴에 진짜 웃음을 담은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울면서 해원이 웃는 것을 보며 생각해냈다.


맞아. 따뜻함이 고픈 거다.


갓 구워낸 귤과, 지글지글한 핫팩 같은.


계(界)가 무너진 도시 서울. 이곳에선 도시 찾아볼 수가 없는 그 따뜻함이.


회사를 다니면서도 책을 꾸준히 읽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게 잘 되지 않아서 부끄럽고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은섭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잖아.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천천히.


따뜻한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해 우리는>, 김윤진 이단 연출, 이나은 극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