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를 색깔로 표현하면,
흰색, 아이보리 색, 연한 회색
레몬 색, 연두색, 옅은 물색
단정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처음부터 흠 하나 없었을 것 같은.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연수, 웅이, 지웅이는 저마다의 역사 속에서 몇 차례고 상처받은 인물이다. 스스로 견뎌내기에 벅차, 제 상처의 갈퀴로 곁에 있는 사람을 할퀴기도 한다.
현재를 무대로, 서로를 할퀴었던 과거의 사연을 조금씩 상기해내며 서사는 이어진다.
과거는 윤색되기 마련.
좋았던 기억은 화사하고 아팠던 기억마저 눈이 부시지만 반어적이게도 과거가 밀려오는 순간, 순간마다 인물들은 따갑게 찔린다. 반복될까 두려워한다.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머뭇거리던 연수, 웅이, 지웅이. 그들의 모습이 나는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미워하든 용서하든 그건 나중 일이야.
다만 나는 네가 지금 이 시간을 그냥 놓치지는 말길 바란다.
그게 다야.
- 그 해 우리는 ‘동일’
부쩍 건조해졌다.
이따금 설레고 슬프던 것도, 무시로 신이 나거나 화가 나던 것도 더는 없는 한결같은 상태. 아, 평안하고 차분한 ‘성숙한’ 마음가짐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기분을 1부터 10까지 숫자로 표현할 수 있고 가장 부정적일 때를 1, 가장 긍정적일 때를 10이라고 하면 항상 3 또는 4 언저리에 머물렀다. 웃는 날도, ‘킹 받을’ 힘도 없이 하루가 매일이 되어 흘렀다.(오늘은 내일이, 모레가 되어 흘렀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벌써 15년째 인연. 먼저 연락도 잘 안 하는 무심한 이의 생사확인을 참 꾸준히도 하는 고마운 사람이다. 안부를 묻기에 답했는데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너와 나눈 메시지 중에 오늘이 제일 건조하다’고 했다.
“전에는 화가 나면 화가 나서 난리, 난리를 하고 재미있는 게 있으면 흥분해서 이야기하고 했는데 너랑 친구하는 동안 오늘이 가장 건조하네. 걱정되게.”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나도 알고 있었다. 시간이란 것은 쌓여만 가는데, 무엇을 비우고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한지 오래였다. 소화되지 못한 지난 시간의 탓일까. 심장의 수분이 쪽쪽 빨리며 지낸 것이 여러 해 되었다. 그것이 이제야 티가 나나 보았다.
의심 증상이 발현된 것은 최근이지만 어쩌면 꽤 오랫동안 시간을 놓치고 있었는지 모른다. 미움으로도, 용서로도 녹이지 못하는 과거의 울타리 안에서 까치발을 들고 종종거리면서.
이런대로 저런대로 하루하루가 흘러가지만 나 역시 과거의 파편을 끌어안고 때때로 괴롭다는 이야기다. 어쩌다, 무감하게 묵묵하게 걷고 있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게 만드는 것 역시 과거의 갈등이나 실패, 결핍이다. 한 개인에게 과거란, 어찌할 수 없이 주관적인 역사이기에 누굴 쫓아가 붙들고 ‘이제라도 좀 해결해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럴 때면 종종 ‘나의 하루는 무용한 것이 아닐까’하는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내 인생 별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꽤 괜찮은 순간들이 항상 있었어.
내 인생을 초라하게 만든 건 나 하나였나 봐.
- 그 해 우리는 ‘연수’
드라마는 그 모든 초라함을 따사롭게, 섬세하게 그러안았다. 연수와 웅이, 지웅이의 계절을 지켜보면서 웃다가, 깔깔대다가도 눈물이 터졌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로 끝났어야 할 인연이
10년이 흘러 카메라 앞에 강제 소환돼 펼쳐지는
청춘 다큐를 가장한 아찔한 로맨스 드라마.”
이 드라마의 작품 소개다. 참 겸허하다. 그보다는 ‘아찔한 로맨스 드라마를 가장한 청춘 다큐’에 가깝다. 이토록이나 생생하니까.
더 이상 초라하지 않게 살아갈 자신이 있냐 하면, 확답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이 드라마를 통해 위로받았던 기억은 꺼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흰색, 아이보리 색, 연한 회색
레몬 색, 연두색, 옅은 물색
<그 해 우리는> 특유의 단정하고 따뜻함은, 모진 빗금을 매만지고 보듬으며 빚어낸 빛깔이라는 것을.
* 사진 출처 : sbs <그 해 우리는>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