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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Dec 29. 2023

정체

편지 4

퇴근길. 다리 위가 꽉 막혔어.


눈앞은 온통 까맣고 붉은빛이야.


해가 서둘러 저무는 탓일까, 겨울 저녁의 어둠은 다른 계절의 그것보다 칠흑 같고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선 차의 후미등은 벌겋게 작열하고 있어.


붉은빛이 또렷이 보였다,

서서히 갈라졌다,

다시 합쳐져.


자꾸만 그래.


저 앞 어딘가에서 차들이 제 속도를 내고 있긴 한 걸까, 하는 생각은 잠시.


위험천만하게도 의식은 점점 더 몽롱해지고 운전대를 잡은 손에는 감각이 흐릿해져 가.


약기운 탓일까.


세밑이면 성실하게 나를 파고드는 바이러스는 올해도 어김이 없었어.  


꼭 목이 그렇게 아프더라.


가느다란 철수세미로 목줄기를 긁어내는 듯한 통증이 피안으로 흐르려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었어.


“아..”


짧은 비명과 함께,


문득, 오른손으로 가슴을 짚었어.


흉통인가? 아니다.


분명 흉부 쪽에는 아무런 통각이 없었는데 가슴이 아프다고 느꼈거든.


그 순간 절로 눈이 감겼는데 의식 속에 네가 떠버렸어.


그래 (너는 ‘응’보다 ‘그래’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곤 했지), 의식이 제 열을 벗어나 흐트러진 채로, 난 너를 헤매고 있던 거야.


잠시 육신에서 벗어난 의식은 자유롭게, 자유롭게 너를 향해 가 너를 보고, 듣고, 느끼고, 웃었다.


하지만 의식이 육신으로 가두어졌을 때, 곁에는 네가 없어서 난 마침내 모든 게 없었던 일이란 것을 깨닫고 아파할 수밖에.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어.


대신 헛구역질 같은 울컥거림이 자꾸만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할 수만 있다면 펑펑 울고 싶었어.


몸이 진동할 만큼,


차가 부서질 만큼,


땅이 뻥 뚫려버릴 만큼.


내가 그만 이 슬픔에서 벗어나 지하로 꺼질 수 있게.


이런 때만큼은 차라리, 너를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고 싶어져. (이내 그 생각을 후회하지만.)


휴대전화를 들어 네 연락처를 찾아 한참 바라봤어.


하지만 자신이 없었어.


지금쯤 나 아닌 다른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을, 너의 즐거움과 평안을 깨뜨릴.


이렇게 이 저녁도 난 평안하지 않게 되었다.


넌 어쩌다 더 이상 날,


왜 사랑하지 않게 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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