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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Nov 28. 2023

1979년 12월, 그리고 2023년.

영화 <서울의 봄>


각하!     


1987년, 작은 소도시 국민 학교 4학년 6반 교실에 절도있는 두 음절이 울려 퍼졌다.

담임교사는 11살(만 9세~10세) 아이들 앞에 꼿꼿하게 서서 경례를 붙였다. 

손을 내리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이 대통령 각하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한다고?”

“각하!”      


담임이 했던 그대로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목소리를 모았다.      

얼굴이 둥글고, 8:2 가르마를 정갈하게 빗어넘긴 양복차림의 담임교사는 뿌듯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남학생들은 계란 하나가 들어갈 만큼 가볍게 주먹을 쥔 손을 바지 옆 선에 맞춰 차렷 자세로 서 있다가 각하가 쳐다보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담임은 주먹을 쥐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여학생들은 치맛자락을 가볍게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고 인사를 한다.”     


담임이 있지도 않은 치맛자락을 잡고 새침하게 무릎을 굽혔다. 

그 장면에서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와락 웃었고, 담임이 눈을 부라리면서 소리를 쳤다.     


“웃어? 이게 장난인줄 알아? 정신 똑바로 차려, 이 새끼들아!”     


대통령의 아들은 ‘영식’이라 하고 대통령의 딸은 ‘영애’라고 하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담임은 우리는 모두 ‘충성’ 스러운 각하의 국민임을 주지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얼마 후, 우리들은 학교 근처의 도로에 일렬로 주르륵 서 있었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저 멀리에서부터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을 신호로 선생님들의 구령에 맞춰 모두 함께 ‘와아아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팔이 떨어질 기세로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진출처: 뉴시스)


5초나 되었을까? 찰나의 순간에 검정 승용차 행렬이 우리 앞을 스쳐 갔다. 

당연히 우리가 ‘각하!’를 부를 일도,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힐 일도 없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의 학생 수는 무려 2300여 명이었다. 단 몇 초의 시간을 위해 2300명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학교 인근의 도로에서 1시간을 기다리다가 ‘각하’의 행렬을 향해 태극기를 흔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흘긋 담임의 얼굴을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담임이 왜인지 웃는 것 같지 않게 웃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무안한 웃음이었다. 각하의 코빼기도 보지 못한 이유였을까? 진실은 담임만 알겠지.         

당시 검은차를 타고 쌩- 지나간 '각하'는 전두환이었다. 

 



어제,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다. 해야 할 일은 밀려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뒤숭숭 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냥 재끼고 놀자 싶은 마음에 영화 시작 30분 전에 극장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10여 분을 남겨놓고 극장에 도착했고, 아침 할인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실화에 기반한 영화이니, 사건의 흐름이나 배경은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 그날의 기억을 풀어놓을 것인지 궁금한 마음과 혹시나 영화적 장치로 시원한 반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약간은 있었다. 물론 기대는 정확하게 빗나갔다. 극중 전두광의 신군부와 대비되는 진압군의 무능함에 속이 터지고, 국방 장관은 줘 패고 싶고, 목적을 이룬 전두광의 웃음에 소름이 돋았다. 이를 두고 선악을 나누기 애매한 포지션이긴 하나 당시 신군부 세력을 ‘악’으로 규정한다면 악의 꼼꼼함과 추진력 앞에서 그에 맞서는 ‘선한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맥없는 것인지 허탈함이 밀려왔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이 성공한 이후, 우리의 역사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굳이 되짚지 않아도 될 일이다. 신군부의 불법, 초법적 권력 찬탈, 1979년 12월이었다.     



이미지 출처: 서울의 봄 공식 포스터.


나만 잘 살면 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원칙 따위 무시해도 그만이고, 권력을 동원해 입맛대로 ‘우리편’에 힘을 싣고, 더 높은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타인의 삶을 짓밟아도 그만이라는 삶의 태도가 2023년이라고 다를까. 오히려 모양을 달리했을 뿐, 집요함은 더욱 깊어졌다.      




솔직히 고백컨대 영화를 보는 내내 속이 터지는 마음 한편으로 극중 ‘전두광’의 추진력에 속시원한 매력을 느낀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사실 우리는 저마다 크고 작은 ‘악의’를 품고 산다. 도로에서 내 앞을 막는 자동차에 짜증이 나서 욕설을 내뱉거나 더 많이 받은 거스름돈을 모른 척 하기도 한다. 내가 손해 보기 싫어 거짓말을 하기도 하며, 누군가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도 불쑥 내뱉는다. 타인의 멘탈을 흔들어 내가 이익을 취하기도 하고, 불공정한 계약을 ‘관행’이라며 밀어붙인다. 속고 속이면서 악착같이 조금이라도 나에게 더 좋은 길을 찾느라 악을 쓰는 것이다.  그의 바탕에는 ‘나의 이익’ 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사람은 다 그렇다고 합리화 한다. 그래,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겠다. 요즘 세상의 가치라면 가난한 부처보다는 부유한 개돼지가 낫다고들 하니까. 다만, 완벽할 수는 없어도 ‘그럼에도 지켜야할 사람도리’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정도는 괜찮아.’ 라는 것들이 모이고 모여 권력을 동원해 죄없는 이들을 살해한 이에게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은 것들이’ 라는 말을 듣는 모욕을 뒤집어 쓰게 된다. 심지어 ‘저런 시원함이 필요하다.’는 마음 속의 개소리에 혹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도 하고.           


아, 참고로 정우성은 정우성이다. 역시 정우성이다. 답답해도 정우성! 졌어도 정우성! 누가 뭐래도 정우성. 정우성 만세!     

(전두광 역할이 정우성 배우였다면, 나는 사상전향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잡담: 할일은 태산이고, 일정은 빠듯한데 영화나 보고 있을만큼 한가하지 않은데 이러고 있습니다. 제가

건강문제도 자꾸 발목을 잡고, 이래저래 심란합니다.

어찌됐든 끝이 있겠지요. 곧, 다시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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