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119 구급차를 타보았다.
(미리 말하지만 큰 일은 아니다. )
눈이 많이 내린 다음 날, 생수 한 묶음과 일용할 양식들을 사서 작업실로 나왔다.
예정보다 조금 늦어진 일정이라, 마음이 급했던 것도 같다.
차를 주차하고, 트렁크 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손쓸 틈도 없이 미끄러졌고 발목을 접지르며 넘어졌다.
누가 그랬나? 쪽팔림은 고통을 이긴다고. 응. 과거의 내가 그랬다.
대학 시절, 8cm 하이힐을 신고, 학교 앞 횡단 보도를 건너다가 그대로 자빠져서 무르팍을 찧었을 때, 나는 보았다. 양쪽 차선에 정차한 차들, 그 안의 눈동자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음을.
그렇다. 쪽팔림이 고통을 이겼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빛의 속도로 그 길을 벗어났다. 무르팍에서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지금 40 몇 년을 살았다. 쪽팔림이 고통을 이기기는커녕, 고통은 쪽팔림을 때려눕혔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찔끔거리고 울고 말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날따라 지나가는 고양이 하나가 없다. 고양이 손도 빌릴 판인데.
결국 네 발로 기다시피해서 차로 돌아와 앉았다. 다행히 왼발이다. 오른발로 운전해서 병원으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감생심. 아파도 너무 아팠다.
결국 119에 도움을 청했고,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119 구급차를 타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119는 응급실 인계가 원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응급실이 있는 병원에 실려 갔으나 다행히 평일 오전이라 병원측의 재량으로 응급실이 아닌 정형외과 외래진료를 볼 수 있었다.
그와중에 제대로 걷지를 못하니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는데, 보호자도 없이 119 타고 온 중년여성(또르르)은 병원 간호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진료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뼈가 생각보다 튼튼했던 것이 문제였다. 엑스레이에 이어 CT까지 찍었으나 뼈도 인대도 크게 상하지 않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정형외과 의사는 나에게 내 발목 사진을 보여주며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동네 의원이었으면 물리치료를 하고, 이것저것 치료를 하라고 했겠지만, 여기는 2차 병원이죠? 딱히 할 게 없어요. 약 드시고 쉬세요. 가시면 됩니다.”
엑스레이와 CT 까지 10만원 언저리의 진료비가 나왔다.
‘이런 씨&*(!~. ’
그 며칠 후엔 응모하려던 공모의 마감 기한이었고, 나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작업실 2층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가만히 쉴 수만 있으면 좋았겠으나 사는 일이 어디 그렇게 되던가?
그 사이 날씨는 더더욱 괴랄해져서 한 겨울에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더니 영하의 날씨에 바로 얼어붙었다. 게다가 내 작업실은 경사가 심한 언덕길이다. 그 길이 얼어붙었다. 멀쩡한 다리로 걷기도 힘든 그 길을 다친 발을 절뚝이며 오르내렸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수십번, 수백번이었다. 준비하고 있던 글도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다리까지 다쳤으니 딱 좋은 핑계 아닌가.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반복하던 패턴이었다. ‘다음기회에 완벽하게 하자’ 는 달달한 핑계, 불확실한 희망에 기대어 도망친 세월이 이만큼이다. 이쯤에서 끊어주지 않으면 나는 재기불가능의 상태에 빠질 것이었다. 가나다라마바사. 라도 써서 내기로 했다. 갑자기 주인공이 죽어버려도 할 수 없다. 여러분의 행복을 빈다며 하늘로 올라가는 개막장판타지라도 할 수 없다.
그냥 엔딩을 찍어야 했다.
마감일 새벽 5시 반에 응모를 마쳤다. 결과는 뻔하지만, 일단 냈다.
그리고 내내 절뚝거리며 다니는 중이다.
다음 목표를 정했다. 시나리오 공모에 도전하려고 한다. 일정상 포기했었는네 그냥 가기로 했다. 덕분에 담낭수술은 또 밀렸다. 계속 음식조절을 했더니 참을만 해서 미뤄도 될 것 같았(는데 사실, 어젯밤에 고생을 좀 했다. 그래도 약으로 어찌저찌 견딜만 했다.) 언제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수술부터 받을 생각이다.
무모할 수도 있겠다. 가능성이 별로 없는 일인 것도 안다. 그 사이 내가 많이 녹슬었음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자꾸만 '다음기회. 완벽할 나자신' 의 함정에 빠지고 싶어진다. 그러나 다음기회는 없을수도 있고, 갑자기 완벽해질 나자신은 더더욱 개소리다
그리고 일상의 나는 점점 옹졸해진다.
오늘 아침, 약국에 약을 사러 갔다. 약국 앞에 딱 한자리 주차공간이 보여 후진기어를 넣는 순간, 갑자기 오토바이가 그 틈을 파고들어와 날름 세워버렸다.
짜증스럽다. 빵- 클락션을 울렸지만, 비켜줄 리가 없다. 흘끔 보더니 유유히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먼 곳에 주차를 하고 약국까지 절뚝거리며 걸어가는데, 약국 앞에 주차된 오토바이가 죽도록 얄밉다. 마음 같아서는 걷어 차버리고 싶다.
약을 샀는데 카드 지갑이 없다. 휴대폰 카드앱을 켰더니 제멋대로 로그아웃이 되어버렸다. 아이디? 비밀번호? 기억이 날 리가. 결국 계좌이체로 해결했다.
또 지갑은 어디서 잃어버린 거야? 카드 재발급은????
짜증이 밀려온다. 혹시나 싶어 차안을 뒤져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들던 지갑인데...
툴툴 거리며 내리려던 차에 운전석 옆 구석에서 지갑을 발견했다. 신이 죽진 않았구나.
나는 오늘 내내 그 오토바이를 저주할 것 같다.
절뚝이며 걸어 다니는 마음이, 이토록 옹졸하다.
*잠시 들렀습니다. 새해 잘 지내고 계신가요?
잊은듯 살다가 반갑게 또 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