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을 아시나요? 조신시대의 선비이자 시인이었다고 하지요. 강원도 영월군에 가면 실제로 김삿갓면이 있습니다. 김삿갓의 고향이자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 소설 김삿갓의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멘트가 있었습니다. 우렁찬 웃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우매함을 꾸짖는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 듯합니다.
우습구나. 백 년도 못살면서 천년의 근심으로 사는 중생들아!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내친김에 어느 영화의 유명한 장면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에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저씨’를 스크린에 담았던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복수의 상대자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면서 선전포고를 합니다.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난 오늘만 산다.
두 대사를 보면서, 저는 저의 어리석었던 과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조직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직책과 직급도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저는 주도권을 가지고 일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저는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처럼 일했습니다. 그곳이 저의 전부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지시가 떨어지면 바로 가서 행했습니다. 제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일도 지시에 따라 행했습니다. 육체적 피곤함은 언제나 후순위였습니다. 조직과 프로젝트의 발전이 저에게는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장의 보상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멀지만 가까운 미래에 ‘있을 것 같은’ 더 큰 보상이 제눈에는 보였기 때문입니다.
퇴근 이후는 물론이고, 주말에도 지시는 끊임없었습니다. 캠핑을 가거나, 섬으로 여행을 갈 때도 노트북을 챙겼습니다. 언제 지시가 올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시가 떨어지면 바로 해야 했습니다. 바로 하지 못하면 매우 불안했습니다. 제가 일을 잘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투입한 시간과 노력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남은 것은 피곤과 우울감 그리고 패배감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현재가 아닌 미래만을 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성공, 그리고 나에게 주어질지 주어지지 않을지 모를 보상만을 보고 일했기에, 현재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현재를 전혀 보지 않고, 미래만을 보았기에 당연히 몸과 마음은 지쳐갔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곳을 떠나면서 성공과 보상에 대한 짐을 내려놓고 나왔습니다. 지금의 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성공’과 ‘보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예전과 다른 점은 그 과정이 매우 즐겁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저를 알아주는 ‘벗님’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허름하고 작을지언정 제가 좋아하는 캠핑 장비를 싣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차가 고급 세단 승용차보다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