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작 Dec 17. 2023

손 편지 쓰는 계절

제 수표를 찾아주세요

영국에서 일 년 넘게 차 없이 지냈다. 가까운 거리는 많이 걸었고, 버스로 튜브로 기차로 다녔다. 한국에서 받아온 국제면허는 일 년이 지나서 기한이 만료되어 효력을 잃었다. 영국에 185일 이상 5년 미만 체류한 자 중 영국에 체류를 목적으로 입국했고, 한국 운전 면허증이 있는 사람은 면허 시험을 다시 볼 필요 없이, 영국 운전 면허증으로 교환을 해준다. 안내 표시 종류가 많고 어렵다는 면허 시험 대신 교환만 하면 되니 편리하지만 갖춰야 할 서류가 여러 가지다.


우선 영국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가서 운전면허증 번역본을 받아야 한다. 집에 프린터가 없어서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신청서를 출력하여 작성했다. 여권과 운전면허증, 거주 허가증도 복사했다. 그러고 나서 운전면허증 번역본을 받을 수 있는 봉투와 우표를 사기 위해 우체국에 갔다. A4 사이즈 봉투를 사서 2파운드, 영국 여왕이 그려진 회색 우표를 붙이고 우리 집 주소를 썼다.


대사관에서 민원 서비스를 받으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두 명 분의 민원을 처리할 것이므로 타임 슬롯 두 개를 예약했다. 준비한 서류를 꼼꼼히 챙겨 제출했다. 생각보다 무척 빨리 접수가 됐다. 역시 내 나라 말로 소통하는 게 최고이고 우리나라 서비스 속도가 최고다.


대사관에서 번역본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체국에 가서 운전면허 교환 신청서 (D1 Form)를 2세트 가져왔다. 작성해야 하는 신청서와 작성 안내문이 들어있고 그 봉투를 그대로 이용해 운전면허 담당 에이전시에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그리고 운전면허증에 들어갈 사진이 필요하다.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증명사진을 준비했다. 남편은 사진이 없어서 파일을 찾아다가. 다행히 여권 재발급할 때 증명사진 용도로 만들어놓은 파일이 있어서 그걸 usb에 담아 기차역 앞 사진 출력소에 들고 가 5파운드를 주고 6장을 뽑았다.


봉투에 넣어야 하는 것은 한국 운전면허증과 거주 허가증, 운전면허증 번역본, 교환 신청서, 그리고 내 거주 허가증을 돌려받을 반송 봉투와 수표이다. 반송 봉투는 중요한 거주 허가증을 운송할 것이므로 추적이 가능한(비싼) 스페셜 딜리버리를 선택했다. 우체국 직원이 우표 세 개를 나란히 붙여주었다. 영국 여왕이 둘, 동방박사가 하나. 총 7.4파운드(무려 12,000원가량) 반송 봉투를 내 것과 남편 것 두 개 사서 우리 집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 차곡차곡 접어서 각각 신청서에 동봉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43파운드 수수료를 우체국에서 수표로 사서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표는 현금으로만 결제가 가능했다. 지갑 깊숙이 넣어둔 50파운드를 꺼내 내 신청서를 해결했다. 결제한 수표에 있는 번호를 면허 교환 신청서에 기입했다. 다음날 현금을 가지고 가 남편 것을 부쳤다. 우체국에서 어제 그 창구 직원이 내 얼굴을 기억하며 오늘은 현금을 들고 왔냐 아는 체했다. 어제와 같은 용도로 수표를 사는 것이어서 어제 보다 수월하게 빨리 마쳤다.


어차피 오래 걸린다고 들었기에 마음을 비우고 기다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빠른, 꼭 일주일 만에 우편물이 두 개 도착했다. 내가 손으로 우리 집 주소를 적었던 바로 그 반송 봉투였다. 반가운 마음에 봉투를 뜯었는데 면허증이 아니라 거주 허가증과 내가 작성했던 신청서, 그리고 인쇄된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신청서에는 빨간색 펜으로 이것저것 표시가 되어 있었다.


편지 내용을 읽어보니 신청서에 한 가지 항목을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입국한 날짜를 쓰는 것이었는데 내가 블로그에서 정보를 찾아 작성한 것을 보고 남편도 그대로 썼기 때문에 두 장 다 반송이 됐다. 하지만 거주 허가증은 확인을 했으니 다시 보낼 필요가 없다고 쓰여 있었다. 나의 신청서를 받은 이와 남편의 것을 받은 담당자가 다른 모양이었다. 남편 봉투에는 수표와 한국 면허증이 그대로 들어 있어서 다시 담아서 보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잊어버리고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외출하려는 데 남편 이름으로 도착한 편지가 현관에 떨어져 있었다. 남편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책상에 올려 두고 나왔다. 남편은 말없이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냈는데 기다리던 영국 면허증 사진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하며 내 것도 곧 도착하겠지 하고 기다렸다.


다음 날 기다렸던 편지가 도착했다. 우체부가 문에 있는 편지함으로 밀어 넣은 봉투는 남편이 받았던 것보다 좀 컸다. 담당자가 달라서 그럴 수 있게 거니 하며 봉투를 열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면허증은 없고 내가 보냈던 신청서와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내용은 내가 수표를 동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송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현금을 절대 동봉하지 말고 43 파운드를 수표로 보내야 한다고 자세히 적혀 있었다.


나는 분명히 우체국에서 수표를 사서 그 자리에서 바로 봉투에 넣었기 때문에 누락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처음 반송 되어서 나에게 왔을 때는 수표가 들어있지 않았다. 어떻게 이것을 증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무래도 수표를 다시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며칠 내내 비가 와서 해를 볼 수 없었고 아이들은 감기에 걸려 숨쉬기를 힘들어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큰 아이가 열까지 나서 속상한 날이었다. 자꾸 이런저런 덜그럭거리는 일들로 조바심이 나던 날이었다. 여기서는 수입이 없고 신용이 없으므로 신용카드가 아닌 직불카드를 쓰고 있는데 그 계좌에 돈이 거의 없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았던 날이었는데 운전면허증 두 번째 반송이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각종 서류 준비며 대사관과 우체국을 오갔던 건 나였는데 남편 것은 나오고 내 것은 나오지 않다니 조금 억울했다. 처음에는 화가 나다가 그러려니 하고 내려놓아졌다. "각오하고 온 거잖아. 이럴 줄 알았잖아.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빨리 진행되고 있잖아. 내 수표가 없어져서 43 파운드를 다시 내야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뭐. 우체국에 CCTV로 추적이 가능한지라도 알아볼까. 내가 적은 번호로 어떻게 안될까..." 여러 생각을 하다가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노트를 찢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리사

이 편지가 당신에게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분명히 처음 신청서를 보낼 때 우체국에서 수표를 구입해 동봉하였습니다.
처음 제 편지를 받은 분께 다시 한번만 확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재은으로부터


구구절절 설명하기 전문이지만 여전히 영어로는 한계를 느꼈다. 받은 그날 다시 바로 보내고 싶어서 후다닥 편지를 써서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에 다시 보냈다. 다행히 우체국에 확인해 보니 우표를 붙일 필요가 없는, 선불 봉투라고 했다. 빨간 우체통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잘 해결이 되기를 바라면서 또 며칠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 수표를 다시 구입하는 것은 그때 가서 걱정하기로 하고 잊어버렸다.


그 며칠 우체국에 자주 갔다.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러 즐거운 마음으로 연속 이틀을 갔었다. 오랜만에 손글씨로 크리스마스 카드와 주소를 썼다. 그 익숙해진 느낌으로 오늘은 면허증 담당자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뭐 하나 수월하게 되는 게 없다 생각하니 답답했지만 한 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온라인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다가 종이에 글을 적고, 봉투에 담아 우체국에 가서 이걸 부쳐서 이런 내용을 전달하다니. 이 첨단 시대에 얼마나 아날로그 하고 느린 방식인지.


어느 날 또 현관에 떨어져 있는 봉투 하나가 있었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안에 카드가 들어 있었다. 운전면허 교환 담당자에게 손 편지를 쓴 지 9일 만에, 면허증이 도착했다. 드디어 교환을 하게 되어 기쁘긴 한데 뭔가 찜찜하다. 수도 요금이 그랬던 것처럼, 운전면허도 내 수표를 찾았는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발급이 됐다. 사라졌던 내 수표는 어디서 다시 나타난 건지. 내가 편지를 안 쓰고 43파운드+수수료를 내고 다시 수표를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냥 손글씨로 썼던 간절함이 전해졌다고 믿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에서 굴 까먹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