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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Sep 22. 2022

오늘도 나는 초코파이를 사러  한인 마트에 간다

Team HTH (1)

환절기다.


작은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더니 전에 없이 학교 생활에 의욕적이다. 학교 내 클럽, 운동, 로봇팀, 교외 자원봉사 등으로 엄청 빡빡한 일정을 보내더니, 결국 탈이 났다. 감기에 걸려 주말 내내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던 것. 결국 감기는 주말이 지나서는 아들에게 옮겨갔다. 그 덕에 어제 워터폴로 훈련은 취소했고, 오늘은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다. 그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원래 오늘 오후에는 작은 아이 피겨 연습과 큰 아이 시합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이들 둘 다 아픈 덕에 일정은 갑자기 여유가 있어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오후에 아이들 간식을 들고 워터폴로 시합에 가려고 한다. 비록 우리 아이가 뛰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스낵 맘, 픽쳐 대디

이번 학기에 나는 아이들 간식을 맡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이들 간식으로 돈을 따로 모으지는 않았다. 부모들이 알아서 돌아가며 간식을 챙겼다. 실은 이것도 누가 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 8시부터 연습하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못 먹고 집에 가는 것이 안쓰러워 우리 부부가 베이글을 사다 날랐다. 2시간의 고된 훈련에 지친 아이들은 베이글 한 개쯤은 순식간에 먹어치웠고, 먹느라 바쁜 그 와중에도 어느 한 녀석도 빠지지 않고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이뻐서 그다음 주에도 또 베이글을 준비해 갔다. 그랬더니 다른 부모들도 한 주씩 돌아가면서 간식을 준비해 주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다른 부모들보다 애정이 넘쳐서 간식을 준비해 갔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크면 거의 스스로 차를 몰고 오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만 16세가 지나면 운전면허를 딸 수 있다.) 부모들이 아이들 연습을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일 뿐이다. 우리 아들은 당연히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방과 후 연습은 보통 친구 차를 얻어 타고 가지만, 토요일 아침 훈련은 집에서 출발하므로 우리가 데리다 주어야만 했다. 거의 코칭 스텝으로 발룬티어 하는 학부모가 아닌 이상, 유일하게 매주 아이들 연습을 보러 오는 학부모다 보니, 아이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먼저 해결해 준 것뿐이다. 금요일 밤 9시에 훈련 마치고 집에 돌아갔다가, 다음 날 새벽 6시 집합에 맞춰 나오느라 머리는 까치집을 지은 채, 눈곱도 못 떼고 파자마 입은 모습으로 뛰어나오는 아이들이 대견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번 시즌 시작도 어김없이 8월 초에 시작했다.

우리 팀은 다른 여느 운동팀이 그렇듯 학부모들의 참여가 필수다. 당연히 팀 맘이 펀드레이징을 하고, 학부모들이 다양한 역할에 참여를 한다. 필요한 포지션에 자리가 없는 경우, 다른 학부모들에게도 도움을 청하는데, 간식 담당자가 비어있단다. 작년에 남편이 아이들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 역할을 했는데, 올 해에는 누가 그 역할을 해 줄지 모르겠단다. 아니, 차라리 우리 보고 해 달라고 하면 편했을 것을! ㅎㅎ

남편에게 묻지도 않고 코치에게 가서  해도 남편이 바쁘지만 시간 비는 대로 와서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간식도 내가 담당을 하겠다고 했다.


10년 묵은 숙원이었던 엄마 백통을 갖다.

남편이 박사과정 말년 차일 때 연구 분야가 광학 쪽이다 보니 한참 렌즈를 사모으던 때가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줌렌즈인 백통 렌즈는 갖고 싶었지만 너무 비쌌다. 결국 다른 렌즈만 몇 개 사고는 세월이 흘러 Canon DSLR 카메라 가방에 먼지만 수북하게 갔는데, .남편은 작년에 그 가방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카메라를 집어 아이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여자 워터폴로팀에는 스포츠 사진 전문가인 학부모가 사진을 찍어준다. 그리고 수영팀에도 오랜 기간 동안 팀 포토를 찍어온 엄마가 있다. 유일하게 학교 수중 스포츠 중 남자 워터폴로팀에만 제대로 된 포토그래퍼가 없었던 셈. 남편이 DSLR로 찍은 사진들을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공유하기 시작하자 반응이 엄청났다.

나는 이렇게 (근육이 살아 숨 쉬는) 멋진 우리 아들 (혹은 나)의 워터폴로 경기 사진을 본 적이 없다!


이런 긍정적인 피드백에 남편은 더욱 신이 났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작년 시즌 시니어였던 학생의 아빠였던 팀 메인 코치가 그래서 우리 남편이 작년에 얼마나 멋진 사진들을 많이 찍어주었는지 학부모 회의 때 침을 튀어가며 설명을 하셨다. 코치님, 그렇게까지 안 띄우셔도 걍 우리가 포토그래퍼 자원봉사하겠습니다!^^ 저희가 칭찬에 약한 것을 어찌 아셨나요..

남편은 그날로 10년 전의 숙원이었던 엄마 백통을 주문했다. 처음에 렌즈에 익숙해지는데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제법 좋은 사진들이 점점 더 많이 나온다. 남편은 요즘 유튜브에서 '스포츠 사진 잘 찍는 법'을 검색하며, 어떻게 하면 우리 가족의 마지막 워터폴로 시즌에 우리 아이와 친구들에게 더 멋진 사진을 선물로 줄 수 있을지 궁리를 한다.

초청 경기 중 하나. 분명 남자 경기였는데, 여학생이 남학생들과 함께 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이 여학생은 그 팀의 베스트 플레이어였다!

남편은 매주 사진을 정리해 매주 보내는데, 처음 보는 학부모들도 "사진 잘 보고 있다"며 먼저 다가와서 인사도 하고, 아이들도 남편이 보내주는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지 "지난번 이 사진, 너무 멋졌다"며 친근하게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왜 나만 찍어서 연습에 집중하는데 방해하느냐고 불평하던 아이도 있었다..ㅠ 이제 아이들은 "왜 지난 경기 때는 안 왔냐.. 사진 찍으러 올 줄 알았는데 안 와서 실망했다.. 대신 오늘은 나를 많이 찍어달라"고 장난치기도 하고, 심각한 얼굴로 "혹시 직업이 전문 사진사냐"라고 물을 정도로 친해졌다. 이제 남편은 아이들이 경기 때 꼭 보러 와 주길 바라는 어른 중 한 명이다.


소소하지만 즐거운 일,

나는 그래서 이 아이들이 참 좋다.

남편에 비하면 내가 하는 역할은 참 작다.

부모들에게 $10씩 돈을 걷고 (최소 도네이션 요청 금액이 $10이다. 30명의 아이들에게서 500불을 걷었는데, 혼자 $250을 내서 전체 간식비의 반을 담당해 준 멋진 어머니가 계신다!), 이 넉넉하지 않은 예산에서 좀 더 질 좋은 간식들을 제공하면 된다.

코스트코에서 세일하는 칩과 그라놀라, 그리고 바나나, 그리고 주말에는 아침을 먹여야 하니 베이글이 단골 메뉴가 되는데, 지난주에 동네 한인 마켓에서 오리온 초코파이를 12개들이 한 박스당 $2.99에 세일을 했다. 개당 25센트꼴이니 이건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사봤다. 마침 크라운에서 나온 크림블도 1 더즌 박스가 $1.99 행사 중이어서 이것도 세 박스 개 골랐다.


처음에 아이들에게 42개의 초코파이와 36개의 크림블을 가져다주었는데, 몇몇 호기심 많은 아이들만 맛을 보았다. 그리고는 서로 뭐가 더 맛있는지 자기들끼리 진지한 얼굴로 토론하더라..(아 귀여워~)

당연히 이 날 간식은 남았다.

생각보다 별로인가? 싶어서 그다음 연습 때 안 가져갔다가 다음 연습 때 가져갔는데, 이미 맛을 본 아이들이 이 초코파이와 크림블을 취향에 따라 두서너 개씩 막 집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안 먹어 본 아이들은 이게 뭐냐고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 이미 모든 초코파이와 크림블은 동이 나 버렸다. 못 먹어 본 아이들은 자기도 한 입 만 줘 보라고, 맛 좀 보자고 사정을 했고, 아이들은 그렇게 사이좋게 간식을 나눠먹었다. 미국 아이들도 "한입만~"하는 거 이날 처음 봤다. 하하

(이 날 아이들은 일용할 간식을 제공해 줘서 고맙다며 나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우리는 다음 날도 초코파이를 가져갔는데, 수량이 약간 모자랐다.

하지만 베이글과 포도도 준비되어 있으니 뭐,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남은 두 박스를 모두 가져다 두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뿔싸! 어떤 녀석이 재빠르게 박스에 손을 댔다! 내가 그동안 이 아이들을 겪으면서 한 번도 허락 없이 음식에 손을 댄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날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남편과 나는 일단 오늘은 초코파이를 치우기로 했다. 그래야 허락 없이 간식에 먼저 손댄 녀석이 양심에 좀 찔릴 것 같았고, 부족한 수량으로 아이들을 괜히 자극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날, 분명 초코파이 박스를 본 녀석들은 "'바나나 향 나는 초콜릿 케이크' 대체 어디로 갔느냐"며 코캡틴인 우리 아들에게 찾아댔다고 한다. 정작 우리 아들은 초코파이를 안 먹는데 말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그닥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일들도 팀을 위해 누군가가 발룬티어를 한다는 것은, 그 발룬티어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들에게 '감사하다', '이런 부분들이 너무 좋았다'는 등의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비록 아이들에게 받는 인사일지라도 내가 팀을 위해 들인 시간과 노동이 몇 갑절 더 의미있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에서의 "Thank you"는 참 중요한 표현이다.


오늘 우리 아이는 아파서 경기에 뛰지는 못하지만, 한인 마트에 들러 초코파이 넉넉하게 들고 경기장에 가야겠다.

얘들아, 오늘도 경기 잘하고 이긴 다음 이 초코파이 먹자~~ 초코파이 보고 힘내렴!!


2022년 9월 20일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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