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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Nov 27. 2024

중동 강의 듣다가 불현듯 떠난 과거 여행

오래된 이야기 하나. 나는 한 때 지역 전문가를 꿈꾸었다.


90년대 중반, 이 당시는 소련이 붕괴하고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러시아가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각광받던 때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 러시아어를 전공했었고, 대학에서도 관련 학과를 희망했었으나, 결국 지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언젠가는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겠다 다짐하며.


내 생애 최초의 해외 여행지는 방학 동안 언어 연수로 떠난 모스크바였다. 지금은 타라고 해도 겁이 나는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중국 상하이를 경유해 모스크바로 갔다. 기상 상황이 안 좋아 상하이로 바로 가지 못하고 베이징에서 머물다 상하이에서 승객들을 내려놓고 쉐레메찌예보 2공항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모스크바 국립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하셨던 은사님께서 나를 픽업하러 나와 주셨는데, 구 공산권 국가에서 이런 일은 다반사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자대 대학원이 아닌 서울대 대학원으로 진학을 결정했던 것도 러시아 지역 전문가가 되고 싶었던 내 꿈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 서울대 지리교육과에서 도시 지리를 강의하셨던 이기석 교수님께서는 중국/러시아 국경 관련 프로젝트를 하고 계셨고, 마침 러시아 쪽 프로젝트에 참여할 대학원생이 필요하셨다. 내 모교의 이옥희 교수님께서도 이기석 교수님의 제자로, 함께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계셨기에 나를 교수님께 소개시켜 주셨다. 석사과정생이었던 2년동안 열심히 블라디보스토크 이남의 핫산 지역에 답사도 다녔고 '녹둔도'라는 제법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성과도 냈던 프로젝트로 기억한다. 답사 가서 강도를 만나 겉옷이 칼로 찢기고 가방을 빼앗기기도 했었고,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다 갑자기 비행기가 급강하하여 산소 마스크를 썼던 에피소드는 이젠 지나간 추억거리 쯤 하나다.

전공 수업 중간중간  틈틈히 국제 지역원 수업을 들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지만 러시아/동유럽 지역 연구, 동유럽 경제 연구 등을 들었고, 전공 수업보다 국제 지역원 수업이 훨씬 더 지적으로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2번의 러시아/북한 국경 지역 답사 이외에도 내 석사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 차 서울대에서 지원을 받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도 혼자 다녀왔다. 무척 그럴싸해 보이지만, 대부분의 석사 논문들이 그렇듯, 내 석사 학위 논문은 냄비 받침대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야경(어도비 스톡 유료 이미지)

결국 박사는 포기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역 전문가로 내 시간과 돈, 그리고 열정을 투자해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외교 관계 수립 당시, 반짝 뜨긴 했지만, 당시에도 북방 연구의 주요국은 중국이었다. 중국을 공부한 중국 연구자는 이후 중국의 성장과 함께 상당 부분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당시에도 러시아 지역연구자들은 중국에 밀리고 치이는 상황이었고, 후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과거에는 화려했으나 현재에는 가난하고 볼일 없는 공산권 국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아마 내가 박사까지 러시아 지역 연구를 했더라면 아마 오랜 시간동안 비주류 연구자 명으로 살며 다른 연구자들이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보따리 장사로 오랫동안 인고의 시간을 가졌어했었을 것이다.



이 분야에 엄지 발가락만큼이라도 발을 담궈 본 입장에서 나는 진심으로 중동 연구자들을 존경한다. 

지리적인 중요성으로 따지자면 중동보다는 러시아가 훨씬 가깝다. 아무리 러시아가 중국 연구에 치인다 하더라도, 중동 연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중동은 지리적으로도 멀고, 심리적으로는 더더욱 먼 지역이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했고, #인남식 교수님, #박현도 교수님, #성일광 교수님을 비롯한 소수의 중동 연구자들은 훨씬 열악한 상황임에도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한국에 중동에 대한 지적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중동 연구자들 뿐 아니라, 가끔 이런 연구를 한 분들도 계실까..라는 분야에도 일당백을 하시는 소수의 연구자들이 계신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이 분들을 만난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이 분들이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모험을 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여기까지 오신걸까. 중동이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뜰 것이라는 혜안을 가지고 계셨던 걸까..


앞으로도 이렇게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분들이 또 나올까라는 의구심도 있다.

이 분들은 나보다도 10년 정도 먼저 산 세대로 정작 한국이 가난하고 힘들 때, 소위 돈 안되는 공부를 하신 분들이다. 정작 이 분들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산 우리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에서 이런 모험을 하는 인재들이 또 나올까. 풍요의 시기를 살았기에 내 아이들에게 소위 '돈 되는 공부'에 더욱 집착한 것이 우리 세대의 부모들이 아닐까.. 하는 반성도 가끔 한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할 수 없기에, 삶은 재미있다.

나는 청춘의 꿈은 포기한 대신 결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생 와이프로 삶을 시작했다. 

5년 넘게 남편 박사 과정 뒷바라지하고 아이 둘 키우는데 내 30대 전부와 40대 중반을 보냈다. 이 시간들이 나에게 있어 내가 박사 과정 대신 결혼을 선택했기에 그 선택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도 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인생이란 내가 원하는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서, 남들보도 더 혹독한 육아를 해야만 했다.

내가 더 가정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것은 일반 아이들과는 다른 호야를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나름 미국에서 내 커리어를 시작해 보겠다는 당찬 꿈이 있었다. 그래서 틈틈히 대학원 준비도 했었지만, 호야는 나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러 오라는 전화가 시도때도 없이 유치원에서 왔고, 우리 부부는 무엇이 호야에게 문제인지도 모른 채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땜빵을 하며 이 시간을 버텼다.

일반적인 자폐아도 아니고 일반적인 아이도 아닌, 일반인과 자폐인 그 경계 어느 선에서 조금 더 자폐 쪽에 서 있는 우리 아이. 이 아이를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키워내지 못하면 그 이후도 우리가 책임져야만 한다는 사실이 우리 부부에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엄마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는 결코 아니지만,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 했다는 자부심은 있다.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말이다.

성인이 된 아들이 가진 가능성에 주목하고, 아들을 더 잘 서포트하기 위해 발달 장애 커뮤니티에서 트레이닝을 작년 9월부터 시작했고, 이제는 우리 아이를 시작으로 샌디에고 발달장애 커뮤니티에 도움이 되고자 독립 협력자 Independent Facilitator로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름 열심히 살았고 후회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그럼에도 중동 연구 최고 권위자 세 분의 강의를 듣다보면, 가끔 그 추웠던 블라디보스토크의 1월이 생각나 슬며시 미소를 띄울 때가 있다. 분명 수업은 사범대에서 더 많이 들었는데, 왜 국제 지역원에서 맞았던 겨울 바람이 더 자주 생각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가지못한 내 길이 그리워서 그런걸까, 아니면 아쉬워 그런걸까.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남겨둘테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청춘의 꿈은 아름답지만, 그 꿈을 선택했더라도 내가 살아야 했던 시간들은 내가 현실에서 선택한 시간만큼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한들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삶의 무게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을 나는 너무 잘 안다. 

그리고 그 힘들었던 시간을 잘 버텨내고, 살아낸 나와 내 남편이 너무 자랑스럽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이 만큼이라도 우리가 버틸 수 있었다.


트럼프의 귀환과 이에 대한 중동 상황을 분석한 인남식 교수님의 유튜브 강의를 들으며 오랜만에 낡은 사진첩에서 예전 사진들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결혼 전의 내 삶에 대해 생각한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주저리 주저리 지난 과거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아지는 것 보니, 나도 나이가 들기는 드나보다.


2024년 11월 22일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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