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기능성 자폐인의 레고랜드 취업기(2)
수술을 받은 다음 날, 호야는 퇴원했다.
수술을 받은 날과 그다음 날이 가장 진통이 심한데, 진통 관리가 잘 되고 있다면서 수술 다음 날 오전, 집도의는 퇴원을 결정했고, 회복하는 동안 쓸 휠체어와 목발, 그리고 워커 사용법을 물리 치료사에게 교육받았다. 호야가 입원해 있는 이틀 동안, 남편은 보호자 침대가 없어서 병실에서 의자 두 개를 붙여놓고 앉아서 잤다. 집에 왔다 갔다 하기에는 거리가 꽤 멀어서 아침에 내가 가서 남편과 교대를 하고, 남편은 차 안에서 쉬었다. 호야가 퇴원을 하면 남편은 다리라도 뻗고 누워 잘 수 있었다. 병원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짧게 입원시키는 미국의 병원 시스템이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이건 좀 딴 소리지만, 병원의 의료 시설은 모든 것이 최신식이었는데, 병실 내에 보호자를 위한 시설이 없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보아하니 따로 마련된 보호자 휴게소에서 의자를 붙여놓고 자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보호자가 밤에 따로 간호하는 시스템에 아닌 것 같다'는 문화적 차이의 정도로 이해했다. 호야는 2인실에서 있었는데, 함께 병실을 사용하던 환자의 가족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고, 밤에 보호자가 있는 곳도 부근에서 우리가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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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병원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병원 환자식을 제공하는 식당 직원이 메뉴 리스트에서 호야가 먹고 싶은 것을 주문받았다는 것이다. 호야는 파스타도 주문했고 피자랑 구운 감자를 주문해 먹었다. 작은 아이를 미국 병원에서 분만한 후 차가운 샌드위치와 얼음이 가득 들어있는 콜라를 받아본 적은 있었지만 이건 또 다른 경험이었다. 수술 후에는 유동식만 먹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우리 부부에게 환자식을 주문해 먹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우리는 퇴원 직전, 마지막으로 집도의와 만났을 때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고, 그중에는 조심해야 할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물었다. 집도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호야가 수술을 받은 것은 다리지 위장이 아니니
먹고 싶은 것은 맘껏 먹게 해 주세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호야는 수술한 어제부터 먹고 싶다던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싶다며 우리를 졸랐다. 옆에 서 있던 딸도 먹고 싶다는 데다, 우리도 거의 3일을 제대로 자지도 못한 데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입이 깔깔했다.
이럴 땐 국물이 최고다.
우리는 호야와 퇴원해 집으로 가는 도중, 우리가 자주 가는 베트남 음식점에서 쌀국수를 주문해 집에서 맛있게 먹었다.
이게 원인이었을까.
호야는 집으로 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부터 설사를 했다. 30분마다 한 번씩 깁스한 다리를 끌고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남편이 마침 그전에 화장실 문을 떼 놓았기에 망정이었지 미리 그렇게 해 두지 않았다면, 그날 화장실 문은 박살이 났을 것이다. 아픈 애가 이렇게 밤새도록 화장실을 오가니, 옆에서 밤에 간호하던 남편도 한숨도 못 잤다.
20살 성인인 아들을 간호하는 것은 아무리 엄마라도 쉽지 않은 일이니, 남편은 자신이 간호하겠다며 처음부터 나섰다. 그런 이유로 퇴원 전에도 밤에 남편이 병실을 지켰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들의 배변문제와 물티슈로 샤워시키는 것을 전담했다. 밤에도 언제든 소변이 마려울 수 있으니 아들 옆을 지켰는데, 아들이 한 시간에 두 번씩 화장실에 가니 뒤처리를 도와주고, 좌변기 위를 닦느라 남편도 한숨도 못 잤다. 어찌나 심하게 설사를 했는지, 소변기는 쓸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호야의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병원에서 2-3일에 한 번씩 간호사가 전화를 했는데, 간호사들은 수술 중 사용했던 항생제와 마약성 진통제를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배가 아프다고 하면 타이레놀을 주라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호야의 인턴십이 시작되는 8월 4일까지 약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 점차 처음보다 화장실에 가는 텀은 늘었으나,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호야는 레고랜드 인턴십을 시작했다.
인턴십 첫날은 Sign-up Day였다.
부모들과 인턴십 참가자들이 함께 모여 간단한 브리핑을 받고 필요한 서류에 사인한 후 유니폼을 받았다. 그러고는 모두 유니폼을 갈아입고 레고랜드 정문으로 이동해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직원 명찰을 달아주는 행사를 하고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레고랜드 내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샐러드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Pizza & Pasta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이 날은 아침부터 호야의 배가 괜찮았다. 조심스럽긴 했지만 피자와 파스타를 먹였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배가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제 좀 한 시름 놓나 싶었는데, 이게 웬걸. 밤 9시가 되자 호야는 또다시 화장실 신세를 져야 했다.
간호사들이 처방해 준 타이레놀이 호야의 복통을 일시적으로 완화는 시켜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생각에 평소에 다니던 일반 내과로 가서 검진을 받고 지사제를 받아왔으나 역시나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다른 병원에서 대변 검사와 피검사를 했으나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도 호야의 복통과 설사는 간헐적으로 나타났고, 이 때문에 인턴십도 일주일에 하루 꼴로 빠져야 했다. 결국은 더 이상 일반 병원에서는 내릴 처치가 없어서 호야를 병원 응급실로 전원시 켰고, 5시간 넘게 대기한 끝에 CT 스캔까지 받았으나 이 역시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이 날 호야는 7시경에 응급실로 들어가서 다음 날 새벽 4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호야는 복통으로 약 한 달가량을 고생했다. CT를 찍고 온 후부터 호야의 복통이 나타나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더니 8월 셋째 주부터는 완전히 복통이 사라졌다. 이 동안 호야는 몸무게가 20파운드가 빠졌다. 거의 10kg이 빠진 것이다. 아직도 먹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일상으로 거의 다 돌아왔다. 복통으로 이렇게 고생하는 와중에도 발목은 순조롭게 회복하여 수술한 지 2주 만에 깁스를 풀고 부츠로 갈아 신었다. 그 사이에 2주 기본 교육을 마치고 8월 셋째 주부터 레고랜드 호텔에서 실무를 시작했다. 원래는 우버를 타고 출퇴근할 계획이었으나, 호야가 휠체어를 타고 일을 해야 해서 내가 아들의 통근을 돕고 있다. 이때부터 12학년인 작은 아이도 개학을 해서 남편이 작은 아이의 통학을 전담한다. 9월 초 첵업 때, 집도의가 뼈가 잘 붙었으니 걷는 연습을 하란다. 호야는 매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8시 30에 출근하고 3시에 퇴근을 하고, 틈틈이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으로 가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도 큰 아이 통근과 남편이 바빠 작은 아이를 데리러 가지 못할 경우 대신 작은 아이를 데리러 가는 등, 운전과 내 비즈니스 하느라 정신이 없다. 다행히도 내 일이 어디에서 해도 상관없는 일이라 랩탑을 들고 다니며 오늘은 여기에서, 내일은 저기에서 일을 한다. 이렇게 우리 호밀리네 네 식구는 바쁜 9월을 보내고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명언은 우리 호야에게 딱 들어맞는 말인 듯하다. 자폐라는 어려움이 있어도, 특유의 밝고 명랑한 마인드와 사람들에 대한 친절함을 가지고 성장했고, 다행히 이런 호야의 성격을 잘 이해해 주는 환경에서 살았다. 운이 좋게도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 잘 자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100% 운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자주 든다. 일정 부분은 호야 본인이 만든 것도 있다는 의미이다.
발목 엑스레이를 찍으려고 호야가 엑스레이실에 들어갔는데, 테크니션이 굉장히 밝고 친절한 분이었다. 내가 호야가 들고 있는 전화기를 달라고 하니 괜찮다면서 호야에게 무슨 노래를 듣냐고 묻는다. 호야가 ABBA의 댄싱퀸을 듣고 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하자 엑스레이실에서 쓸 수 있는 기기로 바꿔주면서 이걸로 그 노래를 들으란다. 호야는 그 안에서 댄싱퀸을 들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더니, 결국은 크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호야의 노래는 곧 테크니션들과 함께 부르는 떼창으로 바뀌었다. 상상이 가는가? 발목이 부러진 환자가 엑스레이실에서 두 명의 테크니션과 한 명의 의사와 함께 댄싱퀸을 떼창 하는 장면이..
이런 호야이기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도, 한 시간에 한 번씩 복통으로 화장실을 가고 응급실에 가서 CT scan을 할 지경이어도 여기까지 온 것이다.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는 날이 아니면 레고랜드로 출근했다. 정 못하겠으면 도중에 조퇴를 하는 한이 있어도 휠체어를 타고 일을 했고, 걸어야 다음 달에 인턴십 로테이션 때 자신이 원하는 팀으로 갈 수 있다는 말에 휠체어를 타는 것이 아니라 밀면서 걸어 내려왔다. 나는 그동안 우리 아들의 이런 긍정적인 성격과 저력, 인내심, 그리고 성실함을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살아왔음을 여기에 고백한다
남편이 나에게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모르면 가르치면 되지만,
태도는 가르칠 수가 없다
회사에서 직원들과 일하며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아직 모자란 부분들은 많지만, 적어도 태도만큼은 우리 호야는 훌륭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2025년 9월 14일
E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