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드랑이에선 매일 털이 자라.

강남역 살인사건 _공격이 아니라 고백이었어

by 블블


너는 나를 사랑했을까. 내 잘록한 허리가 참 좋다고 했던 너는, 내 작은 가슴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던 너는. 가끔씩 생각한다. 네가 내 겨드랑이의 털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너는 내 겨드랑이 털을 본 적이 없다. 보았다 하더라도 그건 정돈된 흔적에 불과할 것이다. 주기적으로 드러그 스토어에서 제모제와 데오도란트를 사 왔으니까. 밥 먹고 양치하듯 때가 되면 열심히 제모를 했으니까.


깔끔하게 털을 밀어버린 겨드랑이에서는 비질비질 땀이 배어 나왔다. 여름이면 하루 종일 노심초사였다. 가는 곳마다 위축되었고 야외활동은 주저하게 되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가 너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자연발생 그대로의 나의 겨털을 본 적이 없었기에 너는 나에게 제모를 해라 마라 말한 적은 없었다. 맞다. 나 스스로 밀었고,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점점 친구들과 이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미쳤나 봐' '왜 저래'라는 식의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많아졌다. 시간은 흘렀고 너는 나를 떠나갔다. 너에 대한 그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제모를 한다. 매번 너무나 귀찮아서 영구제모 시술광고에서 가격을 확인해가면서 계속 때가 되면 제모를 한다.


하루는 샤워 중에 제모제를 내려놓다 그 옆에 놓인 할머니의 기저귀를 본 적이 있다. 기다랗고 네모나고 하얗고 빳빳한 기저귀. 수십 장이 차곡차곡 선반 위에 쌓여있다. 내가 제모제를 사듯 할머니는 때가 되면 말했다. "기저귀 좀 사다구" 온라인으로 성인용 기저귀를 주문 해온지 벌써 이 년이 지나있었다. 할머니 겨드랑이에 털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아흔을 눈 앞에 둔 할머니의 몸을 보았다. 축 늘어진 가슴이 거적때기 같았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털을 가지고 수군거리던 나는 할머니의 털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그렇게나 무성적인 존재였다.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 할머니의 겨드랑이 털은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사랑받는 내가 되고 싶어서 기꺼이 털을 민다고 생각해왔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 나 여자이고 싶어서 계속 제모를 하는 거구나. 여자로 보이려면 이 짓을 계속 계속해야 하는 거구나.






강남에서 스물세 살 여대생이 살해당했다. 10번 출구에 많은 메모들이 붙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색색깔 종이조각들. 나는 그 포스트잇이 마치 모두의 겨드랑이에서 자란 털 같았다. '여자'가 되는 순간부터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애초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도-내 연인조차- 몰랐던 우리들의 털. 때가 되면 쑥쑥 자라 밀려나던 털. 그 겨털이 불쑥 삐져나왔다.


그동안 입 밖에 내진 않았던 우리가 느끼던 불편함들이 제모 없이 날 것으로 강남역 한 복판에 드러났다. 밤길을 걷는 여자의 공포.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던 성추행 등등.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여자들이 말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 겨드랑이에선 매일 털이 자라.


그러나 여전히 그 털은 누군가에게는 불쾌하게 받아들여진다. '남성 혐오'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별 것 아닌데 불신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삐져나온 털을 어떻게든 못 본 척하거나 애초에 그런 털 같은 건 너네가 과대망상으로 만들어낸 거라고. 너 참 유난이라고 말한다. 결국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을 다시 받는다. 또다시 상처들이 생겨난다.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내 몸이 이상한 거라고.


정신이상자가 벌인 특수 사례인 것은 맞지만, 나에게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못했던 겨드랑이 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몰랐겠지만 사실 나는 이런 불편함을 겪고 있었다.' 누군가 용기 내어 고백했고 이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느꼈기에 너도 나도 강남역 10번 출구로 향하고 있다. 이런 고백과 공감의 물결이 '남성'을 타깃으로 삼고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한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각자가 자신의 치부를 세상에 내보일 수 있다는 건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다. 우리 왜 그동안 이렇게까지 터럭 하나 남김없이 밀고 살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또다시 윽박지르고, 굳이 이 특별한 케이스 하나로 그렇게까지-별로 유쾌하지 않은-네 역겨운 겨드랑이 털을 보여주는 거냐라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어깨 밑에서도 겨드랑이 털이 자라나고 있다고. 언제 당신도 제모제를 사야 하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고. 어쩌면 이미 당신도 모르게 스스로 제모제를 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닳고 닳아 언젠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이 감정을 토로할 때.


그때 나를 보는 지금의 당신처럼 말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