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10년 다닌 회사. 길어지는 코로나. 갑자기 모든 것들이 시들시들하게 느껴졌다. 아이들 키우고. 일을 하고.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이 무료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얼마 전 친구들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10대를 같이 보냈던 친구들은 이제 40대가 되었다. 그 시절 내 친구들은 싱싱한 배추처럼 단단하고 생기 넘쳤다. 학교 생활은 늘 똑같은 패턴이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찾았다. 하지만, 마흔이 된 우리는 달랐다.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좀 시들해져 버린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해 아이들의 나이도 비슷한 우리는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엄마, 아내, 딸로 살아가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새벽까지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끝이 났다.
그래! 우리도 자신을 좀 돌아보며 살자!
비슷한 시기, 20대 시절 함께 일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그 시절 우리는 야근을 밥먹듯이 했지만 늘 신나 있었다. 누가 worst of worst 클라이언트를 맡고 있는지에 대해 대결할 정도로. 변한 건 체력과 연륜 정도인가? 그날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가 허리가 부러질 듯 깔깔대며 웃었다. 이제 그 친구들은 각자 다른 회사에서 일하며 관리자가 되어 있다. 꽤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있어빌리티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이를 생각해 강남으로 꼭 이사오라고 옛 동료의 얘기에 콧방귀를 날릴 정도로. 우리는 여전히 재미있게 사는 것에 더 집착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래?
두 번의 만남 이후 머릿속에 둥둥 떠다는 질문이 생겼다. '어떻게 살까?'라는 물음. 얼마 뒤 외출을 하는 차 안에서 남편과 이 질문에 대한 얘기를 한참 나눴다.(차에서 하기에 다소 생뚱맞은 질문일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차에서 중요한 얘기를 할 때가 많다.) 다행히 남편과 나는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다. 번지르르한 삶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는 것이다. 사는데 치인 다하더래도 감성이 살아있는. '낭만이 있는 삶'말이다.
낭만(명사)
1.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2.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
낭만적으로 살기로 결심한 그날 밤. 우리는 핸드드립 커피를 위한 장비 풀세트를 질렀다. 천천히 내려 마시는 여유와 집안에 퍼지는 커피의 향이 우리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주말 아침 감미로운 음악을 틀어놓고 핸드드립 장비를 꺼냈다. 또로록 또로록 떨어지는 물방울과 잔잔히 퍼지는 향이 감성을 깨우는 듯했다. 그렇게 주말 아침 식탁에서 아이들에게 '우리 가족은 앞으로 낭만적으로 살 거야'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한껏 고조된 나의 말에 8살 딸아이가 대답한다.
낭만? 낭비하고 만족하는 삶?
순간 뜨끔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낭만적으로 살겠다고 하고 10만 원 상당의 핸드드립 커피 장비를 질렀으니. 뭐 어쨌든. 앞으로 우리는 낭만적으로 살기로 했다. 음악도 듣고 함께 여행하고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마음을 여유롭게. 낭비는 아니지만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