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의 애프터라이프
텍스트창은 먹통이 되고, 화면이 까맣게 점멸했다. 뭔가를 입력해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아무 키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다 화면 하단에 대화창 상자가 뜨면서 텍스트를 알렸다.
'(……현기증이 나며 휘청인다.)'
맞다, 이 게임에는 룰이 있었다.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라는 얘기를 하지 말 것. 그 사실을 발설했다가는, 학습된 게임 AI가 혼란에 빠지면서 게임 엔진에 오류가 생긴다는 것이 제작사의 설명이었다.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는 이런 식이구나.
"괜찮아?"
"어, 응. 잠시 현기증이 나서."
나는 NPC가 어쩌고 하는 얘기는 넣어두고, 다른 주제를 찾아 대화를 이어갔다.
"그냥, 너희 마을 전설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은 다들 여신님을 믿잖아."
"그치? 내가 봐도 우리 마을은 좀 특이해. 그래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니까, 아주 다르지도 않다고나 할까? 선택 받은 사람들은 여신님께 선택 받았다고 하는 식이고."
그렇게 수다를 떨며 연금술 재료 파밍을 한동안 이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 박쥐떼가 저 멀리서부터 날아왔다.
자세히 보니 키이스 무리였다. 모 게임에 나온 몬스터를 그대로 베낀 듯한, 눈알에 박쥐 날개가 달린 외형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제로X제로~의 키이스는 공격력과 방어력이 강한 편이라 떼로 몰려들면 엄청나게 성가시다는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남쪽 숲이 이상했다. 원래 이렇게 몬스터가 출몰하는 필드가 아닌데?
물론 나 혼자라면 키이스한테 좀 맞더라도 방어구가 워낙 단단하니까 버티면서 반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상황이 달랐다. 줄리엣에게는 켄타우로스나 키이스나 마찬가지였다. 키이스는 떼로 달려들 테니까, 이번에는 '한주먹거리'가 아니라 '여러주먹거리'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아카식 레코드에서 무슨 공격을…….
그리고 문제를 깨달았다. 내게 있는 레코드는 광역기와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날려버리는 형태의 공격 마법 뿐이었다. 아까처럼 켄타우로스 같은 강한 몹 한 마리를 공격할 때는 일직선으로 불덩이를 날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십 마리가 떼로 몰려드는 형태라 그걸 쓸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이럴 때는 범위를 잡아서 일대를 초토화 시키는 광역기가 적절했다.
하지만 지금은 키이스가 줄리엣을 둘러싸버렸으니, 공격 범위 안에 키이스는 물론이고 줄리엣까지 포함될 판이었다. 물론 NPC가 플레이어의 공격에 내성이 있다면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쓸데없는 데에서 디테일을 살리는 타입이니까 모르는 일이었다. 으, 이럴 줄 알았으면 요격 미사일 하나쯤 장만해 두는 건데! 물론 대체 중세 시대 배경의 판타지 게임에 어째서 요격 미사일이 아이템으로 등장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러나 고민하고 후회할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놔두면 줄리엣이 키이스의 밥이 되는 것은 확정이었다. 그렇다면 도박을 하는 수밖에.
나는 초조한 손길로 아카식 레코드에서 광역기 하나를 선택했다. 지정 범위 내에 돌풍을 일으켜서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스킬이었다. 평소에는 하늘에서 불화살 수백 발이 쏟아지는 스킬을 애용했지만, 그건 화살이 떨어진 자리에 풀 같은 게 있으면 불이 붙는 스킬이었다. 만에 하나 줄리엣이 플레이어의 공격에는 내성이 있어도 자연적으로 생긴 불에는 취약하다든지 하는 설정이라면 말짱 도루묵이니 이번만큼은 다른 스킬이 필요했다.
스킬을 발동하자, 작은 토네이도 세 개가 범위 가장자리에서 발생했다. 토네이도들은 지정 범위를 빙글빙글 돌며 키이스 떼를 바깥에서부터 해치웠다. 키이스가 떨군 눈알과 발톱과 날개가 토네이도 바람에 휘말려서 함께 빙글빙글 돌았다. 도트 그래픽 주제에 현실적이기는……. 그렇게 토네이도는 키이스 무리를 쓸어버리면서 한가운데의 줄리엣에게 점점 다가갔다.
제발 제발, 이번만큼은 보통의 정상적인 게임처럼 NPC를 내버려 두면 안될까?
그러나 바람이 무색하게도, 줄리엣은 토네이도에 닿자 피격 이펙트를 보이며 쓰러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