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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May 11. 2024

육아휴직을 휴직이라 할 수 있나요

1개월 27일

아이가 웃는 얼굴을 사진으로 다시 봤다. 


방긋 웃는 얼굴이었다. 응가를 물로 씻고 화장실에서 나와서 아기는 천기저귀에 싸여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귀엽고 해맑아 보였다. 


이 아이에게는 부모가 전부인 만큼, 나에게도 이 아이가 전부여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전부터 들어 온, 조심해야 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아이가 부모의 전부가 되는 순간, 부모는 아이에게 집착하게 된다. 집착은 기대와 강박을 부르고, 이는 곧 실망으로, 마침내는 아이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아이에게 부모가 전부였던 시기가 어느 새 완전히 뒤바뀌어, 아이가 부모의 전부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러면 다시 아이는 ‘부모의 전부’로서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 어떤 사치도 허영심도 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내가 아이에게 100% 올인해주지 않으면 어쩐지 배신을 하는 꼴이 되는 듯 한 기분이 든다. 아이를 놔두고 나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만 같아진다. 




산후도우미 서비스를 쓰고 있지만, 관리사님이 아이를 재우거나 아이에게 분유를 먹여주고 계실 때 나는 나의 할 일에 오롯이 신경을 집중할 수가 없다. 회사 일로 치면, 어떤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계속 누군가의 메신저 창을 노려보면서 새 메세지가 올 때마다 즉각 답을 해 주려고 항시 대기하고 있는 상태와 비슷했다. 


왠지 아이를 재울 때 곁에서 같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분유를 먹일 때는 다른 방이 아니라 부엌 식탁에라도 앉아서 같이 존재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어디 서재에 들어가서 진득하게 앉아 글을 쓸 수도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작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겨 놓고서 곁다리 일을 붙잡고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원래 생각으로는 산후도우미 서비스를 좀 더 오래 받으면서 몸 회복도 하고, 또 그 시기를 십분 활용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도 좀 하면서 지내고 싶었다. 이 참에 못 다 썼던 소설을 쓴다든지. 그러나 실제로는 책을 쓰는 게 아니라 ‘읽는’ 것 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육아를 직접 해 보기 전까지는 아이가 이렇게까지 온 신경을 쏟게 되는 존재가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래도 나름 무던한 편이라서 아이에게도 그렇게 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내 할 일을 하면서 아이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을 준다든지, 수면교육을 위해서 퍼버법(울든 말든 잘 때까지 덩그러니 내버려 두는 방법)을 가차없이 쓴다든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제 와서 보니, 육아를 하면서 어떤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한 집중력과 의지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인스타툰을 연재한다든지……. 그러려면 일에 대한 의지가 일종의 소명의식 수준으로 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이의 관심을 요하는 눈빛을 어느 정도 내버려두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결국 아이가 장기적으로 행복한 가정에서 커나갈 수 있으려면 엄마와 아빠도 각자의 인생을 마저 살아가야 했다. 서로가 서로의 족쇄가 되어서는 곤란하니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제로 하려니 그 적정선을 줄타기 하기가 참 힘들다. 이렇듯 마음이 약해지기 때문에 집에서 뭔가를 하기 보다는 결국 회사를 다시 출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회사를 나가면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끌려간다는 느낌이니까, 일정량의 면죄부를 받고 아이와 떨어짐으로써 불가피하게라도 자신의 삶을 살게 된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회사를 다닐 때보다는 육아휴직을 했을 때가 더 내가 하고픈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쏟을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회사에서는 개인 노트북을 열어서 소설을 쓰고 있다든지 아니면 일본어 강의를 듣고 있는다든지, 그런 일은 엄두도 낼 수가 없으니까. 엄두라도 낼 수 있는 지금이 그나마 운신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다고 할 수 있어도 보인다. 단지 기회비용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요청하는 나의 관심’이라, 너무 커서 문제일 뿐이지. 


선배 부모님들은 어떻게 이 난관을 타개했을까? 정말 육아를 하면서는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다. 



 * 표지사진 출처: Unsplash의 Magnet.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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