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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Oct 06. 2020

008. 의존하다

안녕하세요,하다씨

코로나가 터지고 집에만 갇혀있던 3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나른한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창문을 타고 침대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햇빛을 이리저리 어루만지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U반 속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텅 비어 지나는 U반을 보다 울컥 슬픔이 차올랐다. 조금씩 시야가 뿌예지더니 이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10분마다 한 번씩 오가는 요란한 U반 소리만이 내 방을 가득 채우는 고요한 날이었다. 빠르게 지나간 우반 뒤편으로 한그루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겨우내 찬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던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어느새 파란 새순이 돋아났고, 지나가는 바람에 부스럭 부스럭 소리를 낼 만큼 풍성히 자라나 있었다. 원래 사람의 움직임을 볼 수 없는 창 밖이지만 텅 빈 채로 지나가는 U반을 보니 괜히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유령도시에 혼자 살아 남아 집안에 숨어있는 기분이었다.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 월드워 Z와 미국 드라마 블랙썸머가 떠올랐다. 좀비로 인해 신문지만이 거리에 휘날리는 모습이 지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태가 다를 뿐 지금의 상황은 좀비를 피할 때와 비슷하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최대한 마주치지 말아야 하며, 말을 하거나 기침 또는 소리를 내어선 안된다.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감염되거나 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앞으로 생화학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과거 뉴스에 의심을 품었던 나는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현재의 상황이 의도치 않은 바이러스의 창궐이라 한들, 결국 이 시작점에 사람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바이러스를 의도해서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환경을 해치고 마구잡이로 이용한 대가가 이렇게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이 더 무섭게 느껴진다.

 
락다운이 시작되고 한국 미디어는 나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주지 못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뉴스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락다운 시행을 발표하던 날,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온라인 채널을 켜고 구글 번역기를 틀어 귀동냥을 해야 했다. 구글 번역기가 인식한 몇 마디 문장을 받아 든 게 전부였다. 기계가 번역한 문장이 내가 가진 정보의 전부였다. 여기서 다른 한국인들을 사귀지 못했다면 아마 난 정말 고립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외출을 삼가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라푼젤이 된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점점 심해진다면 재난영화에서처럼 미디어는 더 이상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전 인류가 생활했던 방식처럼 그저 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보가 전부인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미디어가 마비된다면 최후의 매체는 라디오일 텐데 나에겐 라디오가 없다. 핸드폰으로 듣는 방법이 있다한들 전기가 끊기면 무용지물이 될게 뻔했다. 새삼 내가 얼마나 많은 기기와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됐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 걸까?

우리의 삶은 가상과 현실을 오간다. 오프라인의 시간보다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세계와 연결된 네트워크는 더 큰 세계로 우릴 초대함과 동시에 실제로 피부로 접하는 세계에 덜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에디슨이 전기를 만든 순간부터 우리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전기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기공급이 끊기면 전류가 흐르는 제품 및 배터리를 사용하는 모든 제품을 사용할 수 없다. 매체는 영상을 송출할 수 없고, 우리는 송출된 영상이 있더라도 접할 수 없다.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나의 기록들, 사진과 일기와 그림들은 모두 영원히 잠기게 될 것이다. 앞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두려움보다 지금까지 가상의 세계에 의심 없이 쌓아놓은 나의 삶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두려웠다. (근래에 싸이월드의 폐업이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예라고 생각된다).  


언제부터인가 노트와 연필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수정이 용이한 컴퓨터에 익숙해졌다. 직접 얼굴을 대면하지 않아도 텍스트 한 줄로 대화하는 것이 낯설지 않아 졌다. 수많은 이모티콘이 나의 실제 감정을 대변하고 있고, 목소리를 내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통화나 직접적인 만남이 더 귀찮게 느껴지기까지한다.
일기장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세상, 존재하지만 실제로 만질 수 없는 나의 기록은 네모난 창 안에 갇혀있다. 마치 거울 속의 나처럼 만지고 싶지만 만질 수 없고, 진짜 같지만 진짜가 아닌 것들을 우린 진짜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디지털 의존도는 앞으로도 심화될 것이다. 미디어의 발전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 무감각해지고 허공에 떠도는 소문에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려한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판단이 틀리길 바랄 뿐이다. 우리의 삶이 비대면/온라인에 집중된다면 정말 우린 가상세계에 사는 아담이 될지도 모른다.
가상의 캐릭터가 진짜 나의 모습이고, 미션을 수행하는 자가 오프라인의 나라고 여기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를 위해 커피를 먹고 여행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게 행복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잘 살 때(행복감을 느낄 때)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 넷플릭스 블랙 미러의 ‘추락’ 편은 SNS의 평가가 삶의 지표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상대방이 준 SNS 평점이 오프라인의 삶을 통제한다. 이용할 수 있는 시설부터 직장, 혜택, 첫인상 등 모두 SNS의 영향을 받는다.
지금 우리의 삶이 이 에피소드와 완전히 다르다 말할 수 없다. 좋아요와 구독자수, 도달률에 따라 달라지는 수익구조 등이 이미 에피소드와 많이 닮았다. 유튜버와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온라인상의 평가가 오프라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 이 글도 아이패드와 무선 키보드로 쓰고 있다. 디지털기기에 의존하는 삶을 두려워하면서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지금 쓰는 글 역시 가상공간에 뿌려져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나의 태도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뿐이다.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불렀던 우리는 더 작아진 텔레비전에 의지하며 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안에 쥐어진 이 작은 가상의 세상을 아무도 바보상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획기적이라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가상세계 거주민이 되어 오프라인에 놀러 오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오프라인에서 오감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의존은 반대말은 독립에 가깝다. 기기에서 벗어나 내 머리와 내 마음, 나의 생각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필요한 우리의 모습이라 나는 믿는다.
기록은 꺼내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것이 머릿속이든 가상의 세계이든 마찬가지다. 저장과 무조건적인 수집에 익숙한 삶에서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생각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기기를 활용하는 것과 기기에 의존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의존하지 않고 활용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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