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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Sep 06. 2023

여름의 존재

무엇을 좋아하면 여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제철과일 복숭아다. 올여름엔 이모가 달에 한번 복숭아 한 박스를 보내주었다. 없으면 먹고 싶고 있으면 먹고 싶지 않은 게 과일인데 복숭아는 그렇지 않았다. 작은 상처에도 금세 곪고 썩는 복숭아의 무른 특성을 좋아하지 않지만, 소복한 털을 입은 복숭아의 겉면과 옅고 부드러운 연분홍 색상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새삼 신기한 과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박, 참외, 포도, 오렌지처럼 단면의 색상이 동일한 과일과 달리 복숭아는 그러데이션 한 것 같은 오묘한 색상을 지니고 있다. 

올해 복숭아가 맛있어서 그런가, 주방에 들락거리며 칼질을 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가. 

하루에 한두 번 복숭아를 먹다 보니 복숭아가 신비롭기 그지없다. 글을 쓰다 보니 복숭아가 먹고 싶어 냉장고에 썰어둔 복숭아를 가져왔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복숭아의 단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니 보면 볼수록 여전히 신비롭기만 하다. 물감을 싹 풀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겹겹이 분홍색을 쌓아둔 듯 아름답기까지 했다. 잘 무르지만 않는다면 더 오래도록 먹을 수 있을 텐데, 하루이틀 손질을 미루기만 해도 멍들고 썩기 때문에 게으른 나에겐 너무 어려운 과일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여름의 뜨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튀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탓에 자기 색이 뚜렷한 계절에는 방 깊숙이 더 숨고 싶어 진다.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는 기후 전문가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뜨겁다 못해 불타오르는 태양과 시리다 못해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자기주장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뚜벅이는 걸음걸음마다 더위와 사투를 벌인다. 

길거리를 걸을 때면 작열하는 태양과 눈싸움을 하고 싶어 진다. 실상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완패하고 만다. 봄부터 만보 걷기를 시작했는데 한 여름 대낮에도 걷다 보니 애플워치를 찬 왼쪽 손목을 제외하고 팔이 새까맣게 탔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심정으로 욕심껏 걸어서 얻은 여름의 표창장이 몸에 새겨진 것에 괜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탄게 뭐가 자랑이라고, 여름을 이렇게 지나는 게 새로웠다. 


나의 여름 나기 원칙은 <더위와 맞서지 않는다>이다. 누군가처럼 시원한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다거나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지금 보니 나는 바다보다 산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한 여름의 강렬함을 마주하지 않고 벗어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인간관계에서도 동일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부딪힘을 피하고 감정의 변화를 최소화할 것.


태양 아래에서 시원함을 즐기는 대신 햇볕이 잘 드는 곳이 보이는 그늘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유유자적 시간을 흘려보내길 좋아한다. 태양이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를 보며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그늘에서 지나는 여름, 이것이 여름의 맛이라면 아마도 꿀맛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여름의 시작은 더위가 아닌 비다. 장마와 태풍이 지나고 나면 무더위가 시작되는데 우리에게 여름은 늘 더위로 귀결된다. 계절의 단면은 이렇게도 다른데 우리는 늘 여름을 뜨겁게 기억한다. 태풍이 몰고 오는 바람과 이따금 진하게 풍겨오는 비바람의 향을 맡으며 나는 여름이 시작됨을 실감한다. 다가올 뜨거움을 시기하듯 쏟아져내리는 세찬 빗줄기가 싫지많은 않다. 그리울 정도로 너무 뜨거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여름은 싫지만 올해 하나 좋아진 게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집에 복숭아가 다 떨어져 간다. 여름이 곧 끝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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