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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Oct 05. 2023

나의 발길이 멈추는 곳

걷는 여행을 즐겨하다 보면 주변의 모든 것에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진다. 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은 나의 여행메이트이자 안내자가 된다. 나무와 하늘, 크고 작은 가게, 흙바닥과 아스팔트, 이정표, 신호등까지 주변에 있는 흔한 소재가 새롭게 보이는 순간이 좋아 여행을 자주 떠난다.  


내 핸드폰 카메라에는 셀카 대신 내가 바라본 것들이 주로 담겨있다. 나는 없지만 나의 취향이 가득한 취향집인 셈이다. 나의 여행사진첩 속 주요 모델 중 하나는 바로 우체통(우편함)이다. 누가 불러 세운 것도 아닌데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우체통이 보이면 발걸음을 재촉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체통 앞을 서성이다 왠지 모르게 편지가 쓰고 싶어져 우표를 사고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특히 한국이 아닌 외국을 여행할 때면 나에게 편지함으로써 나를 기록했다. 외국에서 보낸 엽서가 한국에 도착할 즈음이 되면 마음이 두근거렸다. 엽서란 봉투가 없는 오픈된 종이이기에 '누군가 보진 않았을까'하는 괜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마음속 이야기보다 형식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엽서가 도착하면 제대로 정독하지 않은 채 쓰윽 읽고 넣어 놓는 일이 잦았다. 나를 마주한다는 것이 언제나 쉽지 않다. 그럼에도 종종 여행지에서 나에게 엽서를 써 내려간 이유는 쓰고 읽는 행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 믿고 있다. 


기다림이 주는 설렘을 좋아해서일까.

0.1초도 안되어 전달되는 누군가의 랜선소식보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도착할 우편을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우편이 주는 그 마음을 알 것이다. 때로는 빠른 것보다 느린 것이 더 설레는 법이니까. 

펜팔세대가 아니지만 큰 이모의 러브 스토리에 등장하는 편지를 통해 어렴풋이 그 마음을 상상해보곤 한다. 편지를 주고받는 시간의 길이만큼 아마도 마음은 더 커졌겠지. 그렇게 큰 이모는 큰 이모부와 결혼의 연을 맺었다. 빈 종이에 채워가는 마음이라니. '마음을 담는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 가장 정확하게 표현되는 듯하다. 


여행하는 동안 빨간 우체통이 아닌 다양한 색상을 띤 크고 작은 우체통을 만났다. 유럽의 몇몇 국가는 노란색 우체통을 사용하고 있고 초록색이나 파란색을 사용하는 곳도 있는데 색감이 정말 기깔나다. 그 색감에 반한건지 알 수 없지만 우체통/우편함을 대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개인 우편함은 더 다양하다. 독특하고 귀여운 모양, 생활 속 물건을 재활용해 만든 우편함을 보면 웃음이 난다. 빌라와 아파트에 주로 살았기에 네모난 우편함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래서였을까.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될 기대감보다 우편함을 볼 기대감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게 우편함이라니 나의 로망도 참 독특하다.


편지를 잘 쓰지 않는 요즘 시대에 어느 곳에서나 기념품으로 엽서를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고 재밌는 기념품이다. 부치지 않을 엽서, 말 그대로 기념하는 물건으로 엽서가 사용되고 있다.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엽서를 사다 보니 쓰지 않는 엽서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글을 쓰고 싶을 때면 엽서에 일기를 써 내려갔다. 엽서는 나에게 전하는 마음이자, 일기장인 셈이다. 

돌아보면 누군가처럼 냉장고를 가득 채울 만큼 마그넷을 구매하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때도 있지만, 엽서에 담긴 그날의 감정을 읽을 때면 나만 아는 추억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이유 없이 엽서를 살 것 같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보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웃게 하는 우체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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