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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인 Jun 21. 2023

ep1.34살 생일선물로 희망퇴직 통보를 받았다.

30대 직장인 희망퇴직 에세이

어제만 해도 몇몇 겹의 레이어로 다채롭던 하늘이 오늘은 흰색인지 회색일지 모를 답답한 단색으로 바뀌었다. 조금씩 비가 추적이는 창을 보고 앉아있으니 꼭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


 막힌 벽처럼 답답하고, 스모그로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처음엔 한 번의 소낙비겠구나 생각했는데 아직도 성가시게 내리는 빗방울에 속수무책으로 젖어있는 마음. 울음을 삼키다 눈물이 왈칵 났다. 그 소식을 들은 지 한 달 하고 10일째, 마음이 쉽게 아물지 않는다.


나는 이별을 경험하고 있다.

7년간 다닌 회사와의 이별

직장인이라는 신분과의 이별

무소속이 되었다.

아니, 곧 무소속을 앞두고 있다.  


한 달 하고 10일 전, 매주 화요일마다 있던 고객과의 점심약속을 마치고 차에 앉았다. 우리 부서를 두고 중요한 조직개편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를 켜고 미팅에 참석했다. 이때만 해도 다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희망퇴직을 빙자한 해고 통지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 날의 미팅에서 사업부 폐지를 통보 받았다. 우리 사업부에서 담당하던 제품의 독점판매권을 다른 회사에 팔았기 때문에 우리 사업부는 폐지될 것이며 그러니 소속된 직원들은 회사를 나가라는 것이었다. 사업부 폐지 통보와 함께 3가지 선택지를 제공받았다.


1. 우리 회사의 협력사이며 곧 독점판매권을 갖게 될 C사에 면접을 보는 것

(C사는 국내사이고, 업계에서 강도높은 업무 환경과 수직문화로 유명하다. 직장인이라면 보통 국내사에서 외국계로의 이직을 많이들 희망하는 바인데, 외국계회사인 우리 회사는 국내사 회사로의 '면접 자리'를 만들었다며 선택지라고 헛소리를 했다. '고용승계'도 아닌데 말이다.)  


2. 희망퇴직 프로그램 패키지(혜택)를 곧 공개할테니 원한다면 신청할 것  


3. 경력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상담 받을 수 있으니 이직,창업,전직 무엇이든 이 프로그램을 하며 앞으로 살 길을 찾아보는 것  


그 선택지 어느 곳에서도 다른 부서로의 전환배치는 없었다. '희망퇴직'이라고 하면서, 사실상 '정리 해고'임이 빤히 보였다. '희망퇴직이라면 희망하는 사람만 신청하면 될텐데, 희망 퇴직 신청을 안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라는 질문에서는 '그것은 선택이지만, 부서는 폐지됩니다.' 라는 앵무새 답변이 이어졌다.  

나는 외국계 제약사 영업사원이다. 입사 후 멀티채널 마케팅으로 2년, 영업으로 5년째 근무하고 있는 정규직원이다. 제약사에서 ‘약’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약의 라이프사이클과 부서의 성과가 함께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서가 판매하는 J 약은 15년 전 처음 개발된 당뇨약 이다. 글로벌에서도, 국내에서도 당뇨 시장에서 1등 의 매출 입지를 굳혀온 메가급 약제이다.


다만 약제 시장에서 신약은 15년이 되면 특허가 해제되고, 복제약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게 되는데 올해 23년 9월이 바로 J약의 특허가 끝나는 시기이다. 복제약이 나오는 시기가 되면 그 제품은 전성기를 다 했다고 보는 것이 제약업계의 사이클이다. 그래서 제약 영업사원들에게 ‘약’은 매우 중요하다. 본인의 영업 실력 보다도 ‘약’의 성장과 감퇴 사이클에 따라 세일즈 성과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특허가 끝난 약들을 처치곤란 쓰레기 정도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J 약제는 지금까지 M회사의 성장을 주도했고 캐시카우의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그 덕분에 우리 부서는 회사 내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있는 부서였고, 회사 분위기를 주도해 왔다. 하지만 특허가 끝나가는 지금 회사입장에서 우리 부서 직원들은 J약과 함께 처치곤란 쓰레기가 되었나 보다.


비상식적인 것은 J 약제의 특허가 끝났다고 해서 J 부서원이 해고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J 약의 특허가 풀린 것에 대한 결정과 책임은 기업이 져야 하는데, 그 책임이 그 약을 담당하는 부서 직원들에게 넘어왔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해 보인다. 더욱이 특허만료의 문제는 부서차원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M회사에 입사한 직원들이고, M회사가 준 직무의 자리에서 일해왔을 뿐이었다. 그 자리가 J약을 담당하는 부서일 뿐. 더욱이나 회사는 J약을 국내제약사 C에 팔아넘기는 결정을 하였기에, 분명한 이익을 얻게 된다. 경영악화가 아니라 이익을 얻게 되는 상황인데도, 우리 부서 직원 100명은 J약 담당자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되는 것이다.


회사는 내가 보기에는 가장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회사가 보기에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희망퇴직을 강요하고 있다.


희망퇴직 통보를 받은 그날은 내 생일 하루 전 날이었다. 우리 부서를 대상으로 했던 조직개편 미팅에서 10분의 짧은 통보를 받았고, 사측의 발표문이 마지막 문단에 도달했을 때 미친 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말이 개소리였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숨 죽여 들었으나 사측의 결정은 ‘부서폐지’였다.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온 이유는 발표문 내용에서 ‘회사가 도전적인 상황에서 적응하고 또 서로 성장하자.’ ‘직원들을 위해 최선의 지원을 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청산유수로 뱉었기 때문이었다.

회사 당신은 도전적 상황에서 제품을 팔아넘기고 직원들을 해고하는 결정을 해 놓고서 무엇을 서로 성장하자는 말인가? 서로의 성장은 함께 할 때에서야 할 수 있는 얘기인데 말이다. 말이 안 되는 주어와 서술어의 배치에 단전에서부터 미친 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희망퇴직을 빙자한 정리해고를 통보해 놓고서, 직원들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얼마나 생색을 내는지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 뭔가 불합리하고 ‘뭐지?’ 그들의 논리가 말이 안 되었는데, 그들의 당당함에 또다시 ‘뭐지? 이게.. 그들이 하는 게 정말 직원들한테 잘하는 건가?’ 순간 멍하게 되기도 했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가스라이팅인 건가.


충격적인 통보를 받고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 길. 두 시간이 다 되도록 엑셀을 밟고 밟으면서 큰 소리로 웃고 또 웃었다. 정말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박장대소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는 34살의 생일선물로 근무 7년 만에 희망퇴직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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