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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나의 OOO이다.

내 삶에 찾아온 조그만 선생님을 나는 이것으로 부르기로 했다.

by 진심어린 로레인



일하는 엄마라는 건, 나의 정체성이자 의지이다. 혼자만의 의지로 마라톤 같은 육아를 완주하기는 어렵다. 어떻게 좋은, 조금은 수월한 육아의 환경을 만들어가느냐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이다. 배우고 싶은 열의는 크고, 일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욕심도 크다. 업무의 어젠다 못지않게 육아로 인한 어젠다가 늘 나를 더 뛰어난 멀티플레이어가 되기를 요구한다.


하루는 늦은 밤까지 느긋하게 놀고 노느라 하루 정해진 학습분량과 양치질을 미루는 아이들에게 혼을 내었다. 어쩌면 나도 여유를 갖고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재우고 소파에 기대어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꼼수가 있었기에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에게 속이 상했던 게 큰 것 같다. 그렇게 엄마의 울분을 토하고, 우는 아이들 따라서 나도 펑펑 울어버렸다. 유토피아적인 육아의 세계는 없는 건가? 나도 더 내려놓는 게 답일까?


버럭쟁이 엄마가 매번 낯설고 무서운 둘째는 닭똥 같은 눈물을 계속 흘렸다. 이 사랑스러운 존재감에게 마음의 생채기를 낸 것 같아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나는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조용히 다독이며 물었다.


"엄마, 날 잘 키워주세요-"


메가톤급의 해머가 뒤통수를 내려친 듯,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흐느낌 속에서 자신을 잘 키워달라는 당당한 요구를 반복했다. 나에게 찾아온 선물 같은 아이를, 기저귀 찬 유아기를 거쳐 서서히 독립감을 심어주고 싶었으나 여전히 잘 케어해줘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제대로 일깨워 주웠다.


엄마가 널 잘 키워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 둘과 1인 소파에 이고 지고 뒤엉켜 앉아 우리는 더 실리적인 가정환경을 세팅하기 위한 대화를 이어갔다. 작은 아이의 요구는 엄마가 버럭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큰 아이의 요구는 해야 할 것들을 조정해 달라는 요구였다. 나의 요구는 엄마는 너희들을 감시하고 일일이 해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세 가지 내용으로 점점 더 나은 결과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을 조금이라도 해놓고 등교, 등원한다. 9시 반 전에는 취침을 하기 위해 저녁 먹고 할 일과 양치질을 우선순위로 한다. 노는 시간을 가장 많이 확보해서 자기 전까지 논다.


대화를 통하니 아이도 나도 마음에 응어리 진 불편감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나에게 짐이 아니라, 팀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같은 레이스에서 각자의 트랙을 달리는 선수 같다. 그때그때 신호등에 맞춰 지금은 달릴 때, 멈출 때, 준비할 때를 잘 분간하고 서로 도와줘야 하는 사이인 것이다. 순간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엄마의 신호등이야! 엄마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


다음 날부터 아이들을 깨울 때, 나는 이렇게 부르고 있다.

엄마의 신호등, 어서 일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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