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어린 보챔이 잔소리라고 단정 지어진 그날 이후,
사람마다 컵에 따라 마시는 물의 양은 다르다. 나는 컵에 물을 한가득 따라 마시는 편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하루에 어느 정도 물을 마셨는지 정확히 카운트할 수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다.
전 직장에서 퇴사하는 날, 종종 식사하면서 이야기 나누던 CTO님이 스타벅스 쇼핑백을 하나 건넸다. 새로운 걸음을 응원한다면서. 그 안에는 스타벅스 500ml 블랙 머그잔이 들어있었다. 묵직한 안정감이 있는 심플하게 로고가 박힌 컵. 유행 타는 아이템이 아니라서 나는 그 컵이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 찬장에 고이 모셔놓았다가 2년 전쯤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면서 회사에 두고 쓰고 있다. 그 컵에 매일 250ml 뜨거운 물과 250ml 정수를 따른다. 그럼 놀랍게도 정확하게 넘치지 않을 만큼 그 선을 유지해 컵 안에 물이 가득 찬다. 그렇게 하루에 2번 정도 물을 마시면 하루에 마실 양을 마셨다고 뿌듯해한다.
문득 워킹맘으로 사는 일상은 컵에 할 일이라는 물이 가득 찬 상태라고 느껴졌다. 어느 정도 여유를 두지 못하는 일상의 물 마시기 습관처럼 내 한정된 일상의 컵에 어느 정도까지 물이 찰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이. 일과 육아를 잘 챙기면서도 여기에 적당한 쉼과 배움의 시간을 넣고 싶어서 매일 캘린더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럼에도 체력이 예전만큼 아니라서 기본적인 일과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괜히 과부하 된 삶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지금의 내 용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관리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물이 넘치듯, 비상사태가 펼쳐지고 만다.
돌아보면,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아이들이 일찍 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10살, 7살에게 하루에 푹 자야 할 시간을 최소 8시간 최대 10시간은 확보해주고 싶었다. 종종 자다가 피부가 간지러워 긁느라 깊이 잠 못 드는 둘째 아이를 보면서 내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아침에 7시에 일어나려면 최소 9시 전에는 자야 한다. 그런 나의 마음과는 달리 아이들에게 나오는 말은 격양된 목소리가 많았나 보다. 자기 전까지 해야 할 하루의 루틴이 있다. 자기주도 학습 시간, 저녁 식사, 양치 정도가 가장 기본이 된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들과 하루 학습량을 상의해서 정했다. 자기 주도로 30분 전후로 소화할 수 있는 분량이다. 아이들은 신이 나게 하다가도 때론 루즈했고, 때론 다른 놀이에 정신이 팔렸다. 그래서 그 시간이 이따금씩 뒷전으로 밀려나곤 했다.
그날도 9시가 다 되어서 할 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지우개를 찾느라 이방 저 방을 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기본 필기도구 관리에 소홀한 모습을 보자니 속이 들끓었다. 책상 서랍에 있는 지우개를 찾아주며 보이는 곳에 제자리를 두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첫째 아이가 신경질 적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거기에 둬도 엄마는 뭐라 뭐라 하잖아요 -"
최근 책상이 지저분한 상태로 몇 날 며칠이 있자, 혼났던 것을 떠올리고 불쑥 엄마에게 불만을 쏟아낸 것이다. 이제 내 말이 잔소리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을 보채는 정도가 심해졌고, 걱정 어린 마음이 듣기 싫은 방법으로 전달된 것이다. 나에게 하루 미션의 끝은 아이들이 평온하게 잠드는 것인데, 매일 도장 깨기를 하듯이 치열하게 살아도 그 일상이 쉽게 찾아오지 않는 것에 나도 지쳤다. 빨리 양치를 해야지, 빨리 숙제를 해야지, 이건 다했어? 입이 아픈 그 말을 요즘 들어 꽤 자주 입에 달고 살았다. 나는 그렇게 잔소리하는 엄마로서 벌써 레퍼토리가 되어 버린 상황을 제대로 마주했다.
나는 모든 걸 스탑 했다. 이제 다 그만. 내가 원하는 우아한 육아하는 엄마의 모습이 아닌 게 너무 싫었다. 내가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걸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잔소리하는 엄마보다는 대화하고 싶은 엄마로 오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인상 찡그린 엄마의 표정보다 웃으며 뽀뽀해 주는 엄마의 사랑을 더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더 이상 오늘은 할 일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모든 걸 스탑 시켰다. 그리고 그날은 그냥 아이들을 재웠다.
다음 날 마침 주말인 그날 아침, 나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들,
엄마는 너를 감시하고 보채는 사람이 아니야,
엄마는 절대 그런 역할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잘 만들 수 있을까?"
아이는 골똘히 생각해 보더니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일찍 자기를 원하는 엄마의 바람에 맞춰 8시 전까지 모든 할 일을 끝낼 테니 우선 기다려 달라고 했다. 만약 8시 이후에 마무리가 안되면 한 번 이야기해 줄 것, 8시 반 이후라면 더 말해도 된다고 했다. 자기를 믿어달라고 하는 그 말에서 나는 아이 스스로 만든 책임과 규율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큰 도화지에 적어 방 한편에 붙였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아이는 매일 자기 할 일을 스스로 챙기는 모습을 보였고, 우리는 더 이상 이 과정에서 실랑이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을 겪으며 나는 일 중심의 성취 과정에 집중하는 완벽주의 성향이 육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구나 새삼 느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걸 놓치지 않도록 엄마로서 나의 언행을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언제든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니까. 나도 완벽한 엄마는 아니니까.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먼저 유연해져야겠다. 자, 이제는 컵에 물을 가득 채우지 말고, 들고 걸어가도 넘치지 않을 만큼 적당히만 채우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