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봄 Jan 25. 2018

스물 일곱,

아니 벌써?

얼마 전 모임에 나가서 한국인들을 많이 만났다. 덕분에 오랜만에 내가 몇 살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요즘은 몇 초는 생각해야 내 나이를 알 수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별로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싶)게 되어서 간헐적으로 그런 질문을 받으면 잠시 멈추어 계산을 하게 된다. 게다가 나는 빠른 생일이라서 사회적 나이(?)는 스물 여덟이고, 외국에 살며 생일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스물 다섯이기도 하다. 잉?



스물 일곱.

엄마는 이 나이에 언니를 낳았다. 나는 출산이나 결혼은 커녕 연애도 어려워 죽겠다. 남자친구는 커녕 내 속도 모르겠다. 뭐가 좋고 싫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만큼 확고한 취향의 사람도 없지 싶다가 가끔은 원점으로 돌아와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느낌이다. 삼십 년 전 스물 일곱의 그녀는 뭘 알고서 엄마가 된 걸까? 그녀는 나보다 얼마나 더 '엄마'다웠을까? 혹시 그녀도 가끔 지금의 나처럼 아무것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르겠을 때가 있지 않았을까?


감사하게도 엄마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며 자란 나인데, 엄마가 한 경험을 같은 나이에 똑같이 하라면 잘 해낼 자신 없는 게 태반이다. 중학생 나이에 학비를 스스로 충당하는 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악착 같이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일, 매일 꼬박 두 번 경인선에 두 시간씩 몸을 싣고 출퇴근하는 일, 회사에서 성실함으로 널리 인정 받는 일, 스물 일곱에 내 이름 석자 대신 '엄마'로 불리길 선택하는 일, 서른 일곱 학교에서 울고 온 아이를 오래토록 달래주는 일, 서른 아홉 못다한 공부를 마저 하는 일, 그것도 악착 같은 성실함으로 끝내 장학금까지 받는 일, 마흔 하나 먼 타국에서 혼자 아이 셋 키우는 일, 그러다 영어로 뭘 좀 물어달라는 부탁을 무시한 세 아이들 앞에 끝내 무너져 우는 일, 내 마음 속 두려움, 어두움, 서러움을 감추고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엄마가 되어주는 일, 쉰 넷 - '엄마'로 산지 어느 덧 스물 일곱 해가 지나 다시 내 이름 석자로 걷는 일, 사회 초년생 대우에 불평 한 번 없이 PC 앞에 앉아 수없는 밤을 새며 맡은 일을 완수하는 일.


스물 일곱.

나는 도서관에 가서 5-6시간 공부하고 운동 갔다가 장을 보고 들어오면 그게 스스로 뿌듯한 삶을 살고 있는데.

작가의 이전글 이방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