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chid May 27. 2016

와르르

위태롭기만 한 관계는 엉성하게 쌓아 올린 탑처럼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 같았다. 불안한 느낌은 매번 받아 왔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와 닿은 때가 있었을까. 막상 탑이 흔들리기 시작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안절부절못하는 게 전부였다. 너무 지극해지니 되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 탑을 쌓기 시작할 때는 전도 후도 없을 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순간을 꽁꽁 묶어 냉장고에 넣고 기분 내킬 때 그 부분만 썰어내 음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안에 간직하는 순간이 불어날수록 상대의 순간이 비어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무리 쌓아 올려도 온통 빈틈투성이였다. 그렇게 균형을 잃어가던 탑은 사소한 흔들림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음도 함께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나는  탑의 높이만큼 아팠다. 산산조각 난 순간들을 다시 쌓아보려 할수록 더 엉망진창이 될 뿐이었다. 너덜너덜한 탑을 사이에 두고 흐르지 못하는 마음은 고인 물처럼 썩어갔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만 봐도 그토록 마음이 뒤흔들리는데, 계속 반복될 무너짐 앞에서 도저히 담담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무너져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중간한 높이 탑만 쌓아 올리게 됐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진다 싶을 땐 가차 없이 무너뜨려 버렸다. 처음부터 그 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그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쌓아 올린 것이 안타까울 때는 차라리 탑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허둥지둥 도망가는 내 뒷모습은 아마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minolta x-300 / 제주 한림



멀찍이 떨어져 도망쳐온 곳을 돌아보니 온통 폐허였다. 탑의 조각들이 메케한 먼지가 되어 날릴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자 겨우 출발선에 설 용기가 생겼다. 이것만은 끝까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번만은 끝까지 쌓아 올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는 마음으로. 말에는 어떤 비밀을 심어도 자라지 않지만, 침묵으로 묻어 둔 마음은 무한대로 커져 갔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공들인 새로운 탑도 여지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전의 예감은 항상 틀림이 없었다. 특별한 계기 없이도 하루종일 바닥까지 흔들리는 듯이 어지럽고 가슴이 조여든다. 생을 운명과 내 선택이 대립하는 판국에 비유한다면, 최근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최악의 선택만을 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엔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쌓아 올린 결정들이 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요즘 내 생활은 그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버린 수들로 뒤덮여가고 있다. 그 때문에 과거에 쌓아 올렸던 기반마저 썩어가고 있달까. 판을 뒤엎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거듭 느끼게 된다. 이번엔 나 자신마저 탑과 함께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두렵기에.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