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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청록 Apr 21. 2016

#04. 김동률 - 오래된 노래

수줍은 가수 김동률, 자신의 사연을 선명하게 드러내다

가사를 읽다 #04. 김동률 - 오래된 노래


김동률의 가사는 구체적 장면과 같은 이미지를 그리기보다는 주로 내면의 감정을 담담하게 회술하는 편이다

<취중진담>, <사랑한다는 말>,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등 그의 대표곡들은 대부분 남자의 조심스럽지만 간절한 속마음을 풀어내는 가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단순히 속마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선명한 장면을 그려내는 노랫말이 있다.

특정한 화자에 감정이입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가수 김동률'이자 '남자 김동률'로서 겪은 자기자신의 사연을 쓴 듯한 가사.

좀처럼 방송에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쑥스러운 웃음에 많은 이야기를 숨기던 그 남자의 사생활을 엿본 듯한 느낌이 드는 가사.

하지만 그 속마음마저도 너무나 김동률다운 그런 가사.

바로 5집에 실린 <오래된 노래>다.


https://youtu.be/fsrfgsaHOTQ


우연히 찾아낸 낡은 테잎 속에 노랠 들었어

서투른 피아노 풋풋한 목소리

수많은 추억에 웃음 짓던


언젠가 너에게 생일 선물로 만들어준 노래

촌스런 반주에 가사도 없지만

넌 아이처럼 기뻐했었지


진심이 담겨서 나의 맘이 다 전해진다며

가끔 흥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


오래된 테잎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


널 떠나보내고 거짓말처럼 시간이 흘러서

너에게 그랬듯 사람들 앞에서

나 노랠 들려주게 되었지


참 사랑했다고 아팠다고 그리워한다고

우리 지난 추억에 기대어 노래 할 때마다


네 맘이 어땠을까

라디오에서 길거리에서 들었을 때

부풀려진 맘과 꾸며진 말들로

행여 널 두 번 울렸을까

참 미안해


이렇게라도 다시 너에게 닿을까

모자란 마음에

모질게 뱉어냈던 말들에

그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


오래된 테잎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





[우연히 찾아낸 낡은 테잎 속에 노랠 들었어

서투른 피아노 풋풋한 목소리

수많은 추억에 웃음 짓던]


= 노래는 어쿠스틱의 아르페지오(코드의 한음씩 연주하는 주법) 선율로 차분하게 시작된다. 나긋나긋하면서도 구슬픈 반주에 김동률의 음성이 실린다.

 남자는 청소를 하고 있었는지 혹은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 책상의 서랍들과 수납장들을 열어보다 우연히 노래된 테잎 하나를 발견한다. CD도 사라지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발견한 낡은 테이프 하나.

 그 테잎을 들어보고 싶어 사용한지 10년 가까이 된 카세트도 찾아본다. 그 카세트를 열어 테잎을 꽂아넣고 재생 버튼을 조심스레 눌러본다. "철컥"하고 눌리는 그 손맛이 반갑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더더욱 반갑다.

 박자를 못 맞추고 삐걱대는 피아노 반주에 20대 초반쯤의 풋풋한 목소리가 부르는 허밍.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어 그 어설픈 음악을 듣던 남자의 입꼬리가 괜시리  올라간다. 10년도 더 지난, 이제 막 사랑을 알아가던 그때 테잎을 녹음해 건네주던 장면이 방 한 켠의 흰 벽에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언젠가 너에게 생일 선물로 만들어준 노래

촌스런 반주에 가사도 없지만

넌 아이처럼 기뻐했었지]


= 이 낡은 테잎은 여자친구의 생일날 그녀를 위하 선물로 바친 노래였다. 공테잎을 넣은 카세트를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며칠간 수십번을 쓰고 지운 지저분한 오선지를 보면대에 올려놓은 남자. 긴 심호흡을 하고 녹음버튼을 철컥 누르고서 피아노 반주와 함께 허밍으로 노래를 한다. 하지만 잘못된 건반을 누르기도, 음이탈이 나기도 해서 녹음-정지-되감기-녹음을 몇번씩 반복해 누르고서야 완성한 테잎.

 남자가 생일선물이라고 건네준 빨간 상자 속 들어있는 하얀 공테이프. 여자가 "이게 뭐야?"라고 당황해서 묻자 남자는 "저기... 너 생일선물로 만든 노래야."라고 쑥스럽게 말한다. 여자는 순수한 남친의 선물에 피식 웃고선 감동반 설렘반으로 자기의 AIWA워크맨에 테잎을 넣는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재생버튼을 누르고서 눈을 감고 집중해서 노래를 듣는 여자.

 남자는 그런 여자를 보며 긴장한다. 혹시라도 마음에 안들면 어쩌지... 3분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자에겐 길게 느껴진다. 남자가 초조한 마음으로 여자의 반응을 기다리는 사이 여자는 이윽고 눈을 뜨고 이어폰을 귀에서 내려놓는다. 그러더니 남자를 보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말한다. "이 노래 너무 좋아!!" 남자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반주도 촌스럽고 가사도 붙이지 못했는데도 이렇게 아이처럼 기뻐해주는 여자가 고맙고 또 사랑스럽기만하다.


[진심이 담겨서 나의 맘이 다 전해진다며

가끔 흥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

= 그 뒤로도 여자는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을때도 그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내 노래가 정말 마음에 들었구나' 하고 남자가 기뻐하는 사이 여자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왜 그래? 왜 울어?" 라고 걱정스레 묻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울먹이며 말한다. "그냥 네 마음이, 네 진심이 노래에서 다 전해져서..." 가사가 없어도 멜로디와 반주 속에서도 너를 향한 마음을 읽어내는 아이. 여자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던 남자는 이내 여자를 품에 안고 토닥인다.


[오래된 테잎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


= 한창 과거의 추억에 물들어 있던 남자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사이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겪어온 그에게 그 추억 속의 남자가 갖고 있던 순수함이란 남아있지 않다. 풋풋하게 진심을 건네던 그 아이는 온데간데 없고 여러번의 사랑을 겪으며 찌들어버린 남자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남자는 그때의 자신이 부럽다. 다른 조건들은 계산하지 않고 온전히 사랑만을 바라보던 그때의 자신이 부럽다. 지금은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연정을 품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때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오랜만에 꺼낸 추억 속의 장면들을 회상하면서 그는 그 풋풋함에 웃기도 하다가 그 풋풋함이 없는 지금이 서러워서, 그토록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지금은 제 곁에 없음에 울기도 하면서 하염없이 노래를 듣고만 있는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실성한 바보처럼.


[널 떠나보내고 거짓말처럼 시간이 흘러서

너에게 그랬듯 사람들 앞에서

나 노랠 들려주게 되었지]

= 여자가 남자의 곁은 떠나가고서 영원히 멈춘 것만 같았던 시간도 거짓말처럼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연인에게 세레나데를 바쳤던 젊은 소년은 가수가 되었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수줍게 노래했던 소년이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어른이 된 것이다.


[참 사랑했다고 아팠다고 그리워한다고

우리 지난 추억에 기대어 노래할 때마다]


= 가수가 된 남자는 여자와의 추억을 노래로 만들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 보며 사랑했던 기억, 그녀와 이별할 때 심장이 내려앉을 듯 아파했던 기억, 그녀가 떠난 후에도 잊지 못하고 계속 그리워했던 기억들이 담겨있는 노래들. 그리고 남자는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할 때면 그때의 추억이 되살리는 감정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눈을 감고 그 사랑의 흔적을 하나하나 꺼내며 노래를 불러왔다.


[네 맘이 어땠을까

라디오에서 길거리에서 들었을 때

부풀려진 맘과 꾸며진 말들로

행여 널 두 번 울렸을까

참 미안해]


= 그녀도 그의 노래를 들었을 것이다. 굳이 그의 음악을 찾지 않더라도 라디오에서,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음악,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나누었던 추억들이 그녀의 귀를 타고 들어와 그녀의 맘은 어땠을까.

 그 노래들은 대중들에게 더욱 아름답게, 더욱 슬프게 들리기 위해서 실제의 추억과 실제의 감정보다 과장되곤 했다. 그 부풀려지고 꾸며진 노랫말들이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해오던 그녀의 기억들을 배반해 그녀를 울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노래를 짓고 부르는 사람이 되어 사랑노래를 하기 위해 과거의 사랑의 기억을 활용하는 것이 어쩌면 가수의 숙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또다른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는 그녀를 향해 그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다.


[이렇게라도 다시 너에게 닿을까

모자란 마음에

모질게 뱉어냈던 말들에

그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


= 결국 이 노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연락하고 직접 대면해 사과할 자신은 없는 모자란 마음에, 이렇게 노래를 통해서라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새삼 그녀와 만났던 시간들, 그녀와 헤어지던 순간들에 그녀에게 내뱉었던 모진 말들이 떠오른다. 자신이 내뱉었던 그 말들에 여자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그때의 미안한 마음까지 이 노래에 차곡차곡 담아 남자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오래된 테잎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


= 이토록 그의 마음 속에 수많은 추억들, 수많은 후회들이 피어나는 순간까지 테잎속 남자의 노래는 계속 재생되고 있다. 오래된 테잎 속의 노래가 그녀에 대한 풋풋한 사랑을 담고 있었다면, 지금 이 노래는 순수했던 자신에 대한 그리움, 그녀에게 했던 모진 행동에 대한 후회스러움, 그리고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 담겨있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의 미안함과 가수가 되어 부풀리고 꾸며진 추억들로 또다시 상처를 준 것에 대한 미안함까지.

 그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인 상태에서 그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하염없이 노래를 듣고만 있다. 바보처럼 정신을 놓은 듯 울다가 웃으면서도. 하염없이...




 보통의 노랫말들은 일반 대중이라면 한번쯤 겪어봤을 상황과 감정을 토대로 쓰여진다. 그래야 대중의 공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노래에 드러나는 주인공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특정한 인물은 노래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김동률의 대부분의 가사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된 노래>에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이기에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무명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김동률'의 노래는 수많은 라디오와 길거리에서 오랫동안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곡들에는 그가 사랑했던 누군가와의 추억이 배어들어있었을 것이다. "나도 이런 감정을 겪었었는데"라며 공감하며 음악을 듣는 군중들 사이에 "이거 나랑 있었던 일로 만든 곡이네"라고 생각한 김동률의 연인이 있었을 것이다. 김동률은 그 연인을 향해 그동안의 미안한 감정들을 이 노래에 담아낸 것이다. 오래된 테잎 속의 노래와는 상반된 내용이지만 여전히 그의 진심이 담기 노래를.

 물론 이 이야기조차 허구일 수도 있다. 김동률이 풋풋한 세레나데를 바쳤던 테잎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래된 노래>를 듣는 동안 그가 그려내는 선명한 장면들 사이에서 청자들은 김동률이 부르는 이야기 속에 깊이 물들게 된다. 담담하게 시작했다가 점점 격정적으로 바뀌는 김동률의 목소리도 이것이 그의 진짜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가수 김동률'이라는 특정된 주인공이 부르는 눈에 보일 듯 선명한 장면들이 피어나는 노래. 이것이 좋은 노랫말을 가진 수많은 김동률의 곡들 사이에서 내가 <오래된 노래>를 꺼내읽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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